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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의약품 다루는 제약사가 희귀한 이유

아무도 개발에 뛰어들지 않아 ‘고아 약(Orphan Drug)’으로 불리던 희귀의약품 시장에 봄이 찾아왔다. 하지만 국내 제약사들에게는 여전히 넘보기 어려운 영역이다.

  • 기사입력 2024.03.28 06:00
  • 기자명 이세연 기자
[사진=셔터스톡]
[사진=셔터스톡]

“제약사들이 열심히는 하는 것 같은데 별로 체감은 안 된다”

희귀질환단체의 한 종사자에게 ‘제약사들의 희귀의약품 사업이 활발한 편인지’ 물어보자 나온 답변이다. 희귀의약품 사업은 ‘경쟁 강도가 낮고 약가는 높아’ 블루오션으로도 이야기되지만, 제약사들이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제약사들의 신(新)금맥, 희귀의약품 시장

희귀의약품은 희귀질환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의약품을 말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희귀질환은 약 7000개로 매년 약 250개의 새로운 희귀질환이 보고되고 있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개별 희귀질환 유병 인구는 소수이지만 이를 모두 합하면 총 3억 5000만 명으로, 전 세계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및 암 환자 수의 두 배를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희귀질환 가운데 약 80%가 아직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아 제약사에게는 그야말로 ‘기회의 땅’이다.

2023년 전 세계 희귀의약품 매출은 1730억 달러로, 연평균 11.6%씩 성장해 2028년에는 3000억 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이는 처방의약품보다 약 2배 빠른 성장세다. 또 전체 전문의약품 매출액 가운데 희귀의약품이 차지하는 비중도 2023년 14.8%에서 2028년 18.4%까지 증가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 대형제약사 주요 관계자는 “지금 돈 되는 게 몇 개 남지 않은 상황이다. 고혈압, 당뇨와 같은 일반 질환은 치료제가 얼추 개발됐다. 제약사들은 새로운 영역을 찾아야 하는데, 현재 남은 건 알츠하이머·암·희귀질환 정도”라며 “특히 그중에서도 블루오션 시장인 희귀질환에 개발할 약이 많다. 미충족 수요가 높은 곳으로 가야 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희귀의약품은 시장 파이는 작지만, 약가를 높게 책정할 수 있어 수익성이 좋다. 약가와 환자 수는 통상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정윤택 제약산업전략연구원장은 “예컨대 블록버스터(매출 1조원 이상)급 신약을 개발하려면 100만원짜리 의약품을 100만 명이 투약해야 한다. 하지만 2억원짜리 희귀의약품은 5000명만 투약해도 매출 1조원을 달성할 수 있다”며 “경제적 측면에서 기업들이 (희귀의약품 개발에) 집중할 만한 유인가”라고 말했다.

한 제약계 연구소 COO는 “당뇨병 치료제인 ‘메트포민’의 경우, 보험 수가가 30~40원 수준이다. 현재 전 세계 당뇨 유병률이 약 6%(약 5억 명)라 시장 파이가 크긴 하나, 그만큼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며 “하지만 희귀의약품은 약가를 높게 책정해도 소비자 입장에서는 선택지가 적어 구매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희귀의약품은 ‘부르는 게 값’이다. 2023년 기준 미국 최고가 의약품은 글로벌 제약사 CSL베링의 세계 최초 B형 혈우병 치료제 ‘헴제닉스(Hemgenix)’였다. 1회 투여 비용만 350만 달러(한화 46억 5000만원)이다.

약가가 매년 대폭 상승한 케이스도 있다. 글로벌 제약사 말린크로트의 웨스트증후군(영아연축) 치료제 악타젤(Acthar gel)이 대표적 사례다. 악타젤 약가는 2000년부터 2013년까지 13년간 약 1000배 인상된 바 있다. 2020년 미국 의료보험(Medicare)에 가입한 일반 개인 기준 악타젤의 연간 처방 가격은 약 31만 8000달러(한화 약 4억 1734만원)였다. 노바티스, 머크 등 다른 글로벌 제약사가 2006년부터 2013년까지 7년간 약가를 평균 약 75% 인상한 것과 비교하면 매우 가파른 수준이다.

또 전 세계적으로 희귀의약품 규제가 낮아지고 있다는 점도 희귀의약품 시장 개화의 주원인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희귀의약품 개발을 장려하기 위해 각종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 FDA의 ‘희귀의약품 지정제도’에 지정된 의약품은 임상시험 비용의 25% 세액 공제 및 우선·신속 심사가 이뤄진다. 또 신약 허가 심사료 및 연간 관리비를 면제해 준다. 2023년 기준 FDA의 신약 허가 심사료는 약 320만 달러, 연간 관리비는 약 39만 달러이다. 아울러 시판 후 7년간 독점 판매가 보장된다. 유병률이 당초 추정치를 초과해도 독점 판매가 가능하다.

우리나라 역시 희귀의약품에 각종 혜택을 제공한다. 식약처에 희귀의약품 지정을 받으면, (3상 임상 결과를 제출하는 조건으로) 임상 2상만으로 조건부 허가를 받을 수 있다. 또 우선·신속 심사 진행 및 가교 자료(한국인 대상 임상 시험 자료) 면제와 더불어 시장독점 4년, 품목허가 유효기간 10년을 부여받는다.

일반 신약 대비 허가 리스크가 낮다 보니 처음에는 희귀의약품으로 허가 문턱을 넘었다가 점차 비(非)희귀 증상으로 처방을 확대하면서 블록버스터급 신약을 만드는 전략도 사용된다. 글로벌 제약사 로슈의 항암제 아바스틴(Avastin)은 희귀의약품 지정 후 적응증을 추가해 매출을 두 배 가까이 끌어올린 바 있다. 또 애브비의 자가면역치료제 휴미라(Humira)와 존슨앤존슨의 레미케이드(Remicade) 매출액의 90%는 비희귀질환 환자들로부터 발생했다.

[사진=셔터스톡]
[사진=셔터스톡]

이 같은 이점에 국내외 제약사들이 희귀의약품에 관심을 갖는 모습이다. 특히 글로벌 ‘빅파마’들의 반응이 뜨겁다. 빅파마들은 희귀의약품 개발회사를 인수하고, 기술을 도입하며 시장을 빠르게 장악하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 사노피는 2024년 1월 미국 희귀질환 치료제 기업 인히브릭스를 약 22억 달러(한화 약 2조 8800억원)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통해 사노피는 유전성 희귀질환 ‘알파-1 항트립신 결핍증(AATD)’ 후보물질인 ‘INBRX-101’을 취득하게 됐다. 2023년 5월에는 일본 글로벌 제약사 아스텔라스제약이 희귀 안과질환인 황반변성 치료제를 개발하는 미국 이베릭바이오를 59억 3000만 달러(한화 약 7조 9000억원)에 인수한 바 있다.

우리나라 기업과 빅파마 간 ‘조 단위’ 라이선스 아웃(기술 이전) 빅딜도 성사됐다. 2024년 1월에는 LG화학이 미국 제약사 리듬파마슈티컬스에 희귀비만증 신약 후보물질 ‘LB54640’을 약 4000억원에 라이선스 아웃했다. 또 종근당은 2023년 11월 글로벌 제약사 노바티스에 샤르코-마리-투스병 치료제로 개발 중이던 CKD-510을 약 1조 7300억원에 라이선스 아웃했다.

 

관심은 많지만 선뜻 나서기 힘들어

희귀의약품 사업의 수많은 이점에 국내 제약사들도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희귀 신약 개발은커녕 수입 약 사업도 주춤하는 모습이다. 제약업계 관계자들에게 ‘국내 제약사들이 개발한’ 희귀의약품 중 눈에 띄는 품목을 물어보면, GC녹십자의 ‘헌터라제’와 이수앱지스의 ‘파바갈’ 외에는 달리 이름을 올리는 제품이 없다. 둘다 품목 허가를 받은 지 10년도 더 된 제품이다.

원인으로는 국내 제약사들의 자금 부족이 지적된다. 희귀의약품까지 집중할 여력이 없다는 뜻이다. 또 희귀의약품이 시장 파이 대비 고수익이 보장된다 해도, 국내 시장 파이는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작아 제약사들의 부담이 크다.

따라서 국내 제약사들은 개발 과정에서 빅파마에 라이선스 아웃을 통해 후보물질의 모든 권리를 넘겨주는 경우가 다수이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규모가 작은 업체들이 개발한 기술이 어느 정도 완성돼 적어도 걸음을 걸을 수 있는 수준이 되면, 큰 업체들이 알게 모르게 비밀로 사 가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제넥틱의 황반변성 치료제 ‘루센티스’도 개발은 미국의 한 바이오벤처가 했다는 풍문이 있다”고 말했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FDA 승인을 받은 희귀유전질환 치료제 중 75%가 개발 주체와 최종 승인 주체가 상이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관계자는 “국내 제약사들은 희귀의약품을 개발하기가 매우 힘들다. 안 그래도 작은 국내 시장에서 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 수는 더 적기 때문이다. ROI(투자 수익률)가 안 나온다. 그렇다고 미국이나 유럽에 판매를 하려면 FDA, 유럽의약품청(EMA)의 임상 기준을 맞춰야 하는데, 이는 임상에서 막힌다. 환자 수가 적어 임상 피험자를 모집하기 힘들어서다”라고 말했다.

이에 우리나라는 희귀의약품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발표한 ‘2022년 의약품 허가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허가된 희귀의약품은 총 29품목(희귀 신약 5품목 포함)으로 제조가 3품목, 수입이 21품목이었다. 2021년 허가된 희귀의약품 22품목은 100% 수입이었다.

하지만 수입도 어려울 정도로 환자 수가 적을 경우에는 아예 제약사들의 관심 밖에 나게 된다. 현재 대다수의 희귀질환은 국내에 별다른 치료제가 없는 상황이다. 예컨대 사지에 통증과 부기를 동반하는 희귀병인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은 환자들이 세계의약품센터를 통해 독일 제약사에서 의약품을 직접 주문해야 한다. 의약품명은 ‘프리알트’로, 약가는 앰플당 700만원대이다. 여기에 냉장 포장·운송비까지 더하면 환자 개인의 부담금은 1000만원대로 치솟는다.

한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한 국내 제약사가 독일에서 프리알트 원액을 수입해 의약품을 개발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비용 문제로 포기했다. 이 증후군은 국내 환자 수가 1만 명 이하로, 제약사 입장에서는 수지타산이 안 맞아 약가를 비싸게 책정해도 사업성이 떨어져서다. 이 같은 희귀질환은 보험급여가 책정되기 힘들어 약가가 비싼 만큼 환자들의 구매력도 떨어진다. 우리나라는 ‘약물 경제성 평가’를 통해 약가를 책정하는데, 비슷한 대조약이 없다 보니 평가가 어렵다. 결국 대부분의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 환자들은 임시방편으로 마약성 진통제에 의존하는 상황이다.

반면 암·종양 분야 희귀의약품은 비교적 제약사들의 관심이 높다. 2022년 허가된 희귀의약품 21품목 중에서 16품목이 항악성종양제였다. 이 분야는 작용 기전에 따라 적응증 확대가 용이하며, 희귀질환 가운데 환자 수가 많아 비교적 안정적인 수익 창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산업연구원은 “2028년 전 세계 판매액 기준으로 예상된 상위 10개 희귀의약품 가운데 절반은 종양 치료제에 해당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 대형 제약사 주요 관계자는 “예컨대 혈우병 관련 의약품이 나오면 비슷한 기전의 의약품이 우르르 따라 나오듯이 특정 질환에 쏠림 현상이 일어난다. 지금은 희귀질환 중에서도 암·종양, LSD(리소좀축적질환), 다발성경화증 등 큰 영역 위주로 시장이 치우쳐 있다”고 말했다.

이세연 기자 mvdirector@fortun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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