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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민우의 제약기업 이야기] Professional Responsibility

어떤 결정이 기업 윤리를 흔들고 가치판단을 흐릴 수 있다면 기업 내외부 관계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 기사입력 2024.03.19 14:07
  • 최종수정 2024.03.19 14:56
  • 기자명 나민우
[사진=셔터스톡]

경영대학원 과정을 시작하면서 듣게 된 첫 과목의 이름이 ‘Professional Responsibility’였다. 직역을 하면 ‘직업적 책임감’인데, 사실 이름만으로는 가장 나중에 수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과목은 ‘기업윤리학(Business Ethics)’이라는 교과 과정에서 이수해야 하는 것이었고, 수업은 기업 차원에서 발생하는 다종다양한 불법과 부조리, 리더십의 부재와 부실 경영, 선택적으로 외면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배상에 관한 부정적 사례들을 분석·평가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2009년 당시 이 과목이 우선적으로 학생들에게 소개된 이유는, 아마도 2007년부터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의 중심에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를 필두로 대형 투자은행들, 그리고 수많은 미국 기업들의 파산 신청과 이를 주도했던 경영진들의 책임, 더하여 이들에게 지급된 천문학적 액수의 보수와 퇴직금이 연일 사회적 비판을 받은 것에 기인한 것이라 본다.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신청 규모는 약 6000억 달러로 지금까지도 역대 최대규모다. 2023년 최대 파산 신청이 실리콘밸리은행 금융그룹(SVB Financial Group)의 200억 달러였으니 인플레이션을 고려하지 않아도 약 30배가 넘는다.

기업과 경영인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이미 낯설지 않고 윤리경영 또한 이제는 당연히 품어야 할 책임이자 경영 평가의 지표가 되었다. 그렇다면 한 기업의 업무적 성과와 윤리적 목표가 리더십 안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낼 것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의 답을 찾는 노력은 한 기업이 성숙의 단계로 나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일 것이다.

나는 우리 회사의 전체 조직 안에서 보면 중간 관리자이다. 그래서 중간 관리자라는 책임의 영역에서 내릴 수 있는 합법적이자 윤리적인 결정들에 대한 고민이 늘 있게 마련이다. 특히 의약품의 생산과 유통을 다루는 직종에 종사하다 보니 나와 우리 회사가 조직적으로 하는 일들은 사람의 생명, 그리고 삶의 질과 직결되어 있다.

필자가 근무하는 회사는 1980년대 초반부터 의약품의 주원료인 API(Active Pharmaceutical Ingredients)를 유럽에서 수입해 미국 의약품 제조사에 공급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많을 때는 500가지가 넘는 원료의약품을 취급했고 그 이름을 외우기에도 벅찰 때가 있다. 주어진 업무에 기계적으로 대응하고 있으면, 많은 경우 내가 다루고 있는 제품의 재무적 가치에만 집중하게 되는데, 약물의 적응증은 무엇인지, 업체들은 어디서 어떻게 생산을 하는지, 왜 이런 처방 트렌드가 생겨나는지 등에 대해서는 간과할 때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입사 초기였던 2003년을 전후로 항우울증(Antidepressant) 글로벌 신약 허가의 수가 급격히 늘어난 것과 2004년 미국 식약처(FDA)에서 같은 군에 있는 약물들의 포장에 ‘Black Box Warning’이라는 경고문을 사용해 24세 미만의 환자들의 자살위험에 대한 경계를 제도적으로 의무화한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종류의 항생제(Antibiotics)와 중추신경계(CNS-Central Nervous System) 의약품, 그리고 항암치료(Anti-cancer treatment) 약물들을 취급하면서도 왜 사람들이 이렇게 소위 ‘독한’ 약들을 복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당시에는 큰 관심을 갖지 못했다가 나중에서야 이유와 트렌드를 분석하고 정리하기도 했다. 이런 배움과 깨달음의 과정을 지나며 관리자로서 일에 대한 의미를 찾고자 했고 이때 생겨난 책임감은 균형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기준이 됐다.

주요 업무가 원료의약품의 수입, 판매와 같은 사무실 업무에서 해외 제조사를 발굴하고 평가하는 현장 업무로 확대되면서, 제조사들이 제품을 생산하는 방식과 수준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전공했던 분야가 화학이나 생물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해외 공장 실사를 진행하게 되면 제조시설 시찰을 간단히 마치고 본업인 사업 관련 회의에 참석했고, 한국에 있는 기업의 제조시설을 방문할 때는 실사 담당자와 함께했기 때문에 주로 통역업무를 했다.

초창기 시절 통상 ‘GMP 통역’이라고 부르는 공장 실사 통역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 제약 업계를 떠나야겠다고 다짐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조금씩 쌓여가자 내 눈에도 보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업체마다 생산시설 관리와 의약품 품질관리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사진=셔터스톡]
[사진=셔터스톡]

경험만을 의지해 본능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리더와 조직, 그리고 사회에까지 큰 리스크가 될 수 있음을 상기하고 깨어 있는 상태로 주변 상황을 바르게 의식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실제 사용하는 의약품의 최종형태는 일반적으로 캡슐, 타정, 물약, 주사, 패치, 연고 등 서로 쉽게 구분되지만 이러한 의약품의 성상, 즉 약품의 외형적 특성과 형상만으로는 품질, 즉 효과를 전혀 구분해 낼 수 없다. 그래서 의약품은 포장이 너무 화려하거나, 약품의 이름이 소비자에게 혼돈을 일으키거나, 약이 아닌 것과 맛을 구분할 수 없으면 식약처로부터 최종 승인을 받을 수 없고, 이는 규정으로서도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

의약품은 제조시설, 생산 공정, 그리고 품질 관리가 사실상 제품 자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업적 이유로 내려진 결정이 기업이 품어야 할 윤리적 기반을 흔들고 가치판단을 흐릴 수 있다면 한 기업의 내외부 관계자들(Stakeholders)은 어떤 기준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지지하며 또 평가해야 할까? 의약품의 최종 사용자이자 소비자인 의사와 환자들은 어떤 신뢰를 이들에게 기대할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제약사 임원 중 한 분이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이 밤에 소변을 가리지 못해 소아 야뇨증 진단을 받고 약을 처방받아 온 적이 있다고 한다. 혹시나 해서 원료의약품 성분과 완제품 제조사를 보니 자신이 근무하는 제조시설에서 생산되는 약물임을 알게 되었고, 그날 이후로는 현장에서 업무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고 했다. 비단 의약품만이 아니더라도 상품과 서비스를 창출하는 기업들은 최종 소비자가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두에 언급했던 ‘직업적 책임감’에 민감하기 위해서 조직 내 개인이 갖추어야 할 소양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순서에 차등 없이 이를 네 가지로 정리해 보려 한다.

첫 번째는, 태도이다. 맡겨진 일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나에게 주어진 사명과 직업에 대한 철학,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향한 존경과 배려심이 제품의 형태로 사용자들에게 그 가치와 함께 전달되고 또 평가받는 것임을 항상 인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여러 기업체와 일을 하다 보면 능력 있는 임직원들도 물론 기억에 남지만 사업 파트너로서 우리 회사와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에 진심이 있고 책임과 배려가 있었던 분들과의 관계가 더욱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 같다.

두 번째는, 집중과 몰입이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성경 속 한 사건을 예로 들고 싶다. 간음한 자를 돌로 쳐 죽이는 유대의 율법에 따라 한 여인이 잡혀 예수 앞에 세워진다. 무리들은 당시 선생이자 지혜자로 불렸던 그의 판단을 주목하게 되는데, 뜻밖에도 예수는 아무런 대응 없이 땅에 손가락으로 무언가 쓰는 모습만을 보인다. 이후 시간이 지나고 예수는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유명한 말을 한다. 이후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고 마지막에는 잡혔던 여인과 예수만 남게 된다.

집중과 몰입을 생각할 때마다 이 사건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유는, 분주한 주변상황과 나를 향한 사람들의 집중에서 오는 극도의 긴장과 스트레스의 한가운데에서 가장 현명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이 리더이기 때문이다. 집중과 몰입의 상태에서 들리는 양심의 소리와 이에 따라 취해지는 결단과 조치는 리더의 책임감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세 번째는, 의식(Awareness)이다. 의식이란 내 주변에서 나에게 영향을 끼칠 모든 환경과 조건들을 인지하고 대응을 위해 본능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준비된 상태라고 생각한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다니엘 카네만(Daniel Kahneman) 프린스턴 대학 교수는 저서인 “Thinking, Fast and Slow”에서 우리의 생각을 움직이는 두 가지 시스템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 시스템은 자동적이며 본능적인 결정을 유도하는 생각의 장치이고, 두 번째 시스템은 애씀, 즉 노력을 통해서 결정과 판단을 하게 하는 방식이다. 상황과 여건에 따라 우리는 이 두 가지 의사 결정 시스템을 모두 사용하는데, 두 번째 시스템이 반복되어 익숙해지면 축적된 경험을 통해 자동적이고 본능적인 첫 번째 시스템으로 변환된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상황들을 이 변환 방식으로 대응할 수 없기에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양한 사업환경과 예고 없이 찾아오는 변수들은 우리, 특히 리더들에게 직업윤리와 책임의식에 대해 끊임없이 도전을 주기 때문이다. 경험만을 의지해 본능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리더와 조직, 그리고 사회에까지 큰 리스크가 될 수 있음을 상기하고 깨어 있는 상태로 주변 상황을 바르게 의식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섬김이다. 공교롭게도 대학원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마지막 수업도 리더십에 관한 것이었다. 1970년 미국에서 서번트 리더십 운동 (Servant Leadership Movement)을 일으킨 로버트 키프너 그린리프 (Robert Kiefner Greenleaf)의 저서 “Servant Leadership(역: 섬김의 리더십)”은 이 과목 참고도서 중 하나였다. 책의 후반부에 밑줄로 표시해 기억하고 있는 문장이 있는데, “기업의 역할이란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 기관(Institution)으로서 사회적 자산이 되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는 기업이 사회적 자산으로서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면 구성원들이 윤리적으로 민감하고 도덕적으로 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나아가 사회적 공감대를 이루어 가는 수고를 멈추지 않아야 함을 뜻한다. 그리고 이 마음가짐의 첫 단추가 서번트(Servant)의 어원인 섬김(To Serve)이다.

경영대학원 2년 과정이 끝나고 이제는 무엇이든 하면 될 것 같았던 한때의 열정과 많은 다짐들은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멀어져 간 듯하다. 이번 칼럼을 준비하며 그때를 생각해 보니 이 과목은 책임감으로 시작해 섬김으로 마무리 되어, 이들이 길게 연결되어 있음을 새삼 발견하게 되었다. 학교라는 교육 기관에서 기업윤리와 책임의식 등을 교과 과정으로서 가르치는 이유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이견이 있을 것이고, 앞서 네 가지로 직업적 책임감과 소양이라는 큰 가치에 대해 정리하려 한 것도 부족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선한 양심, 책임감, 그리고 깨어 있는 의식이 내가 속한 조직과 사회를 섬겨가기에는 결코 부족함 없는 자산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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