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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호의 인문경영 서평] 기업이 인류학과 친해져야 한다고?

  • 기사입력 2023.08.08 13:36
  • 기자명 포춘코리아

1997년, 미국의 거대 자동차 기업 제너럴모터스(GM)의 '독일인' 엔지니어들과 '미국인'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회의 때마다 심한 갈등이 일어났다. 미국인들끼리도 집단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공학적 문제를 논의하기 전부터 이미 '부족'마다 회의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문화적 전제가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회의'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런 차이에 대해 생각하기는커녕 차이가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GM은 부족주의에 시달리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GM 경영진은 실제로 직원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아니, 모른다는 것조차 몰랐다.

무엇보다도 문화 간에 발생하는 의사소통의 최악의 오해는 같은 민족 집단의 다른 팀 사이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 후 1980년대 중반에 GM 경영진은 공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보기 위해, 특히 무엇이 잘못되어가는지 파악하기 위해 인류학자인 브리어디를 찾았다.

브리어디는 무엇이 중요할 거라고 미리 정하지 않고 (인류학자답게) 전통적인 민족지학 기법으로 어린아이처럼, 혹은 화성인처럼 자동차 제조 업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관찰했다. 그러다가 부품을 몰래 모아두는 직원이 많다는 놀라운 말을 듣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즈음 자동차업계에는 일본 제조사의 엄청난 실적에 자극받아 이른바 품질 운동이 불어닥쳤고 GM 공장에서도 ‘품질 훈련’을 실시함에 따라 물류시스템이 원활히 돌아가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런데 왜 직원들이 철없는 아이들처럼 자기 사물함에 몰래 부품을 숨겨두는 걸까?

이유는 특정 부품이 떨어져 조립라인이 멈추면 현장 주임, 공장 책임자, 총관리자에게까지 책임이 돌아가고 회사도 금전적인 타격을 입다보니 직원들이 특정 부품을 몰래 빼돌려 쟁여두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공장 안에서 부품을 찾아서 먼저 가져오는 경쟁인 숨바꼭질 '게임'이 일상이 되었고, 급기야 공장의 규율이 지속적으로 서서히 무너지기에 이르렀다. 그보다 놀라운 사실은 이번에도 GM의 고위 경영진은 이런 ‘게임’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는 점이다.(자세한 내용은 《알고 있다는 착각》, 145~165쪽 참고)

⟪알고 있다는 착각⟫ 질리언 테드 지음 | 문희경 옮김 | 어크로스(2022)
⟪알고 있다는 착각⟫ 질리언 테드 지음 | 문희경 옮김 | 어크로스(2022)

알고 있다는 착각》의 원제는 'Anthro Vision'(문화인류학 시각)으로 인간과 사회의 복잡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인류학의 활용법을 다룬 책이다. 2022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 북클럽 도서이기도 하다.

저자인 질리언 테드는 인류학자 출신의 언론인으로 박사 과정 때 구소련의 중앙아시아 오지에서 현장 연구를 수행했고, 소련이 붕괴되며 연구를 계속하지 못하자 언론사에 자리를 잡는다.

저자가 여느 언론인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사건을 취재하고 기사를 쓸 수 있었던 배경에는 현장 연구에서 얻은 인류학적 시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융인들이 수많은 파생상품을 만들면서도 거래의 마지막 결과인 '현실 세계'는 외면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예상되는 위기를 경고하는 기사를 쓴 것도 그중 하나다.

저자의 예측은 2년도 되지 않아 2008년 금융 위기라는 현실로 나타났다. 21세기, 오지가 사라진 인류에게도 인류학적 시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당연한 것을 의심하고 낯선 진실을 발견하는 인류학자의 사고법'이라는 부제처럼 '낯선 것'을 낯익게 만들기, '낯익은 것'을 낯설게 하기, 사회적 침묵에 귀 기울이기를 큰 제목으로 3부에 나눠 담았다. 킷캣, 인텔, GM 등의 기업 이야기부터 미국 트럼프 전 대통령 선거전과 코로나19같이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일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저자는 저널리스트든 사회과학자든 작가든, 타인을 연구해서 먹고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명심해야 할 교훈이 있다고 지적한다. 모두 문화적 환경의 산물로서 게으르게 짐작하고 편견에 휩쓸리기 쉽다는 점이다. 그래서 저자는 네 단계를 거쳐 편향(때)을 벗겨내야 한다고 제안한다.

첫째, 우리의 렌즈가 더럽다는 점을 인정한다. 둘째, 우리의 편향을 인식한다. 셋째, 세상을 다양한 관점으로 보려고 노력해서 편향을 상쇄하려고 시도한다. 마지막으로 앞의 세 단계를 거쳐도 렌즈가 완벽하게 깨끗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명심한다.(《알고 있다는 착각, 208~209쪽)

이는 거의 모든 기업의 지도자와 정책 입안자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화성인이 갑자기 이곳에 착륙해서 주위를 둘러본다면 무엇을 보게 될까? 나는 낯익어 보인다는 이유로, '낯설지' 않아 보인다는 이유로 무엇을 간과하고 있는가?

이제 인류학 연구를 가장 많이 활용하는 곳은 기업이다. 다른 문화권에 투자하는 상황부터 소비자 분석과 마케팅은 물론이고 인사노무관리까지 기업은 다양한 곳에서 인류학을 활용하고 있다. 인류학자를 직접 고용하기도 하고 그들의 연구성과를 빌려 경영 전략을 세우기도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 애플 같은 기업들이 바로 이런 용도로 사회과학 팀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사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인류학자들이 가장 많이 진출하는 기업이 되었다. "오늘날 인류학자는 아마존 밀림 대신 아마존 창고에 들어간다"라는 말이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다.

소비자들은 전적으로 합리적이고 독립적인 선택을 한다고 여겨지지만 실상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빅데이터 역시 마찬가지다. 빅데이터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준다. 하지만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말해주지 못한다. 상관관계는 인과관계가 아니다. 비슷한 이유로 심리학은 개인이 왜 음모론에 빠지는지 설명해줄 수는 있어도 음모론이 어떻게 집단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지는 설명해주지 못한다.

빅데이터와 거시적 차원의 통계는 미시적 차원의 문화적 관찰과 결합 되어야 더 효과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거기다 오늘날 기업과 금융계에서는 환경뿐 아니라 불평등, 인권, 환경, 편견, 다양성에 관한 담론을 끌어내는 새로운 지속 가능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기존의 사회 분석 도구들만으로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의 복합적인 원인을 포착할 수 없다.

이제 우리에게는 터널 시야가 아닌 주변 시야가 필요하다. 심지어 인류학자들은 지난 팬데믹 상황에서 문화적 인식을 이용해 코로나19와 싸우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알고 있다는 착각》, 107~114쪽)

저자는 이를 새의 눈으로 조망하는 대신 벌레의 눈으로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것에 비유하며 이런 관점을 결합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사회문화인류학⟫ 존 모나한피터 저스트 지음 | 유나영 옮김 | 교유서가(2018)
⟪사회문화인류학⟫ 존 모나한피터 저스트 지음 | 유나영 옮김 | 교유서가(2018)

인류학은 인류의 기원이나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흔히 인류학을 발로 뛰는 학문이라고 한다.

《사회문화인류학》은 인간 집단은 어떻게 형성되며, 무엇이 그들을 하나로 묶는가 등 인류학 탐구의 핵심을 이루는 이슈들을 들여다보고 학문적 이해를 돕는 책이다.

존 모나한, 피터 저스트 두 인류학자가 인도네시아와 멕시코에서 직접 거주하며 연구한 생생한 사례들을 중심으로 가족·부족·민족 등 다양한 집단의 형성 과정을 학문적으로 분석했다.

저자들은 성실한 현지 조사와 끈질긴 관찰을 통해 "혈연과 젠더·신앙에 대한 통념을 깨는 것이 인류학의 본질"이라고 강조한다.

만약 인간 행동 법칙을 일반화하려 한다거나 비교문화적 이해가 부족한 상태의 편견을 들이미는 경우가 있다면 다음 언설을 기억하면 좋다.

누가 '그러나 자고로 인간의 본성이란…'식으로 일장 연설을 시작하면 일단 나가는 문이 어디 있는지부터 찾아라! 그 뒤에 나올 말이 진정한 비교문화적 이해의 산물이라기보다는 화자가 지닌 가장 깊숙한 편견의 반영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사회문화인류학, 230~231쪽)

이는 인류학자들이 사회적 세계를 이해하게 되는 방식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있다. '사람 사는 건 어디나 같지만 간혹 다를 때도 있다'라는 것이야말로 지난 한 세기 동안 인류학자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가르침이며,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전혀 사소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인류학자인 나카네 지에는 서양은 사람과 집단이 지역 공동체나 기업체 등의 국지적 현장들을 횡단하는 수평적 계층들(예를 들어 노동조합)로 조직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일본에서는 계급이나 전문 분야 등의 계층을 종단하는 수직적 조직에 대한 선호가 뚜렷하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미국 포드사의 조립 라인 노동자들은 자사 경영진보다 제너럴모터스사의 조립 라인 노동자들에게 동류의식을 느낄 확률이 더 높고, 경영진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반면에, 일본 혼다사의 자동차 노조원들은 도요타사의 노동자들보다 자사의 동료 노동자와 경영진에게 더 큰 일체감을 느낀다.

《사회문화인류학》은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흐름이 그려지게 하는 '첫단추' 시리즈답게 인류학이 어떤 학문인지 친절하게 알려주며,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 심리학 등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채울만한 다양한 이론들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책 끄트머리에 있는 '독서안내'는 더 읽을 책을 소개하며 '두 번째 단추'로 이끄는 세심함이 돋보인다.

우리가 사는 방식을 ‘정상’으로 여기고 다른 방식은 모두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은 다양하고 모든 방식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상해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이를 실질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특히 기호 코드가 계속 변화하는 지금의 세계화된 세상에서는 현실 세계와 가상공간에서 다양한 문화를 탐색할 수 있는 사람들의 가치가 높아진다. 인류학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고 자신을 더 객관적으로 돌아보면 위험과 기회를 더 잘 포착할 수 있다.

《알고 있다는 착각》과 《사회문화인류학》은 다양한 세상 속 진짜 문제를 읽어내기 위한 도구로 인류학을 제시한다. 두 책의 공통된 메시지는 인류학의 관점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라는 것이다.

※ 이 글은 <포춘코리아> 6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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