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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를 채우는 소프트웨어는 결국 인문학 콘텐츠”

[Wheel of Fortune⑩인문의 미래] 최화준의 아카데미즘

  • 기사입력 2024.02.08 17:00
  • 최종수정 2024.02.12 12:54
  • 기자명 김나윤 기자

인문학에 대해 냉담한 오늘날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경원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는 되레 "인문학의 미래가 밝다"고 전망했다.

이경원 연세대 교수는 포춘코리아와 인터뷰에서 "서구 중심주의에 노출 과정에서 비판 의식이나 담론적 저항이 없다면 정신적으로 식민화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사진=강태훈]
이경원 연세대 교수는 포춘코리아와 인터뷰에서 "서구 중심주의에 노출 과정에서 비판 의식이나 담론적 저항이 없다면 정신적으로 식민화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사진=강태훈]

▶이경원 연세대 교수 미국 인디애나대 영어영문학 박사학위 취득. 1997년부터 현재까지 연세대 영문학과에서 셰익스피어, 세계희곡, 유럽 근대성, 탈식민주의 이론 등을 중심으로 연구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 《검은 역사 하얀 이론: 탈식민주의의 계보와 정체성》(한길사·2011), 《파농: 니그로, 탈식민화와 인간해방의 중심에 서다》(한길사·2015) 등을 펴냈다.


 

영미권의 주요 대학에는 ‘PPE’라는 특별한 전공이 있다. PPE는 철학(Philosophy), 정치(Politics), 경제(Economics) 세 가지 학문을 아우르는 융합 전공이다. 1920년대 영국에서 시작한 PPE 전공은 '학벌'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영국 최고 학부로 평가받으며 5명의 영국 총리를 배출했다. 인도 이민자 출신이자 영국 역사상 최연소 총리인 리시 수낙(Rishi Sunak) 현직 총리도 옥스퍼드대 PPE 출신이다.

PPE 전공은 영미권 대학가 중심으로 인기가 높다. 일부 대학의 경우 다른 학과보다 더 까다로운 입학 요건을 요구하기도 한다. PPE 출신 선배들이 졸업 이후 사회 여러 분야로 진출하면서 전공에 대한 후배들의 자부심도 상당히 큰 편이다. 특정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는 아니지만 인문학으로 다져진 폭넓은 시각과 논리적 사고를 훈련받은 PPE 출신들이 높은 잠재력을 가진 제너럴리스트로 평가받으면서다.

영미권과 달리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에 대한 가치는 유난히 박하다. 취업 시장이 어려워져 IT 관련 학과 등 실용적인 이과 전공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다는 분석만으로는 국내외 온도차를 설명하기 부족하다. 시장 경제의 불황은 서구 자본주의 역사에서 주기적으로 있었지만 그것이 인문학의 위기로 이어진 적은 없었다.

인문학의 위기는 과연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 반영된 것일까. 인문학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서구 문화 속 특별한 인식이기에 이를 국내 상황에 직접 대입하기는 어려운 것일까. 오늘날 인문학의 위기에 국내 대학은 어떤 방향을 찾아야 할까. 여러 질문들이 연달아 떠오르지만 쉽사리 답하기 어렵다.

이경원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를 찾아 오늘날 인문학의 위기와 미래 방향에 대해 물었다. 탈식민주의 이론을 전공한 그는 2018년부터 2년간 연세대 문과대학장을 지내며 인문학 중심의 다양한 융합 학제를 시험한 인문학 학자이기도 하다.

 

Q 한국사회 일각에선 ‘인문학의 위기’를 거론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인문학이 미래세대에게 기여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일까.

테크가 지나치게 대두되면서 인문학의 가치가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흐름이 변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면 미래엔 콘텐츠가 굉장히 빈곤한 시대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테크라는 형식과 하드웨어에 채울 수 있는 소프트웨어는 결국 인문학적 콘텐츠이기 때문 이다.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등을 보자. 기술적으로 진보하더라도 그 안에 담기는 콘텐츠는 고대 중세 또는 근대의 문학 내용이나 주제에 머물러 있지 않나. 포스트AI 시대에도 이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기에 우리에게 인문학적 훈련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의 위기’라고 말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되레 인문학의 미래가 밝고 앞으로도 인문학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Q 최근 ‘융합 학문’이 인문학의 대안으로 떠오르지 않나. 이 교수께서도 30여 년 강단에 서며 인문학을 중심으로 한 융합적 시도를 한 것으로 안다.

문과대학장(2018~2020년)으로 재직할 당시 융합학문 학제를 추진한 적 있다. 공과·경영·문과대가 의기투합해 학제를 새로 개발하고 융합 전공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였다. 공대는 테크를 제공하고 경영대는 시장과 연결하는 교두보를 마련하며 문과대는 인문학적 가치와 콘텐츠를 공유하면 큰 시너지 효과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각 대학이 뜻을 함께해 교과별 학점 인정 등 관련 학칙 규정을 개정하는 데 나섰지만 여러 현실적인 문제로 융합 전공을 실현하지는 못해 아쉬움이 컸다. 그렇지만 대학 내에서 인문학의 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한 계기였기에 개인적으론 무척 값진 경험이었다.

 

애플 창업주인 고(故) 스티브 잡스가 2011년 아이패드2 제품 발표회 자리에서 ‘미래 기술’과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애플 창업주인 고(故) 스티브 잡스가 2011년 아이패드2 제품 발표회 자리에서 ‘미래 기술’과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Q 인문학의 미래 방향은 융합 학문이라고 보는 건가.

인문학이 그 자체로도 학문적 가치가 있기에 단적으로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시대가 변화하면서 대학도 이에 부응해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대학의 주인공인 학생들이 요구하는 모습이다. 문과대 학생들의 목소리가 소위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의 줄임말)의 환경을 개선해 달라는 것 아닌가.

소위 ‘문사철’로 꼽히는 전통 인문학에 대한 학문적 가치를 고수하는 것이 학자로서의 사명이다. 하지만 동시에 교육자의 역할도 함께 수행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학생들의 입장도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 그 해결책이 인문학 중심의 융합 학문이라고 봤다.

 

Q 인문학에서 강조하는 비판적 상상력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고 보나.

인문학과 과학의 관계를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 비유할 때, 인문학은 방향타 같은 존재이다. 즉 ‘어디로 가야 하는가’ 혹은 ‘왜 가야 하는가’를 질문하도록 하는 게 인문학의 영역이다. 그 목적지가 잘 설정됐다면, 그다음으로 ‘어떻게 가야 할까’에 대한 효율성과 생산성을 따지는 것이 과학 영역인 셈이다.

인문학의 역할과 기능을 기술의 시대가 인정하면 많은 이들이 걱정하는 포스트휴먼 디스토피아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인문학의 이런 역할은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Q 하지만 현실은 비판 의식을 잃는 개인이 점점 늘어나는 모습인데.

대한민국 속 우리는 세계 자본주의에서 중심부도 아니고 주변부도 아닌 중간지대에 있다고 본다. 세계 자본주의의 첨병 또는 에이전시 역할로서 우리는 자랑스럽게 나아가고 있지만 실상 이면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서구 중심주의에 노출돼 있고 때론 지나치게 오염돼 있는 경우도 많다.

서구 중심주의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거기에 대한 비판 의식이나 담론적 저항이 없다면 정신적으로 식민화가 될 수 있단 점이다. 그러한 풍토가 고착화된다면 개인들은 비판 의식을 스스로 마비시키며 무의식적으로 자본주의의 치킨 게임에 뛰어 들어 갈 뿐이다.

 

Q 정신적 식민화와 이에 대한 저항이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사회 현상은.

많은 영역에서 나타나는 기득권 싸움들이 대표적이다. 기성세대는 그들이 배우고 가르치며 누리고 있던 것들을 그대로 보존하려고 한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들은 저항 담론을 배워 새로운 영역을 만든다. 거기에서 굉장히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며 사회적 전환이 일어난다.

오늘날 많이 이야기하는 포스트휴머니즘 담론과 함께 새로운 사회 집단이 몰려오며 발생하는 저항 역시 전환기적 단계로도 해석 가능하다.

 

이경원 연세대 교수가 '근대성과 오리엔탈리즘' 강의를 통해 수강생들과 자유롭게 토론하고 있다. [사진=연세대]
이경원 연세대 교수가 '근대성과 오리엔탈리즘' 강의를 통해 수강생들과 자유롭게 토론하고 있다. [사진=연세대]

 

이 교수의 본래 전공은 '탈식민주의(Post Colonialism)’에 대한 연구다. 포스트(Post)라는 접두어를 고려한다면 우리말로 ‘후기식민주의’라고 해석할 여지가 있지만 이 교수는 “식민주의를 탈피한다는 의미로 규정하는 게 알맞다”고 강조했다.

그는 “후기식민주의에는 제국주의 시대의 선봉에 섰던 서구 열강들이 식민시대 이후에 부분적 자기 성찰을 한 관점이 반영됐다. 반면 탈식민주의는 각국의 독립 과정에서 유구하게 전개됐던 사회 운동과 그것을 둘러싼 담론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외연이 확장되고 다양한 맥락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Q 정치, 사회, 경제 영역에 탈식민주의 담론이 내포돼 있다고 보는가.

정치학에서는 분명히 이러한 방법론이 사용되고 있고 이 외 많은 사회 영역에서도 인문학의 탈식민주의 이론을 분석 틀로 삼고 있다. 예를 들어 인간과 기술의 헤게모니를 다루는 포스트휴머니즘 논의가 요즈음 활발하지 않나. 이 의제는 본래 영문학에서 다루는 탈식민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Q 탈식민주의 맥락 속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을 바라본다면.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과 비인간의 차이점과 공통점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다. 과거엔 인간과 동물 또는 인간과 자연을 관계 지었다면 오늘날엔 인간과 인조 인간의 관계 등이 새롭게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 포스트휴머니즘에서 강조한 인간은 백인·중산층·남성·유럽 기독교 등의 키워드가 속하는 지배 그룹이었다. 반면 오늘날의 포스트휴머니즘은 외연이 확장되고 새로운 변수가 추가됐지만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나 페미니즘과 같은 저항 중심 인식론의 확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인간과 인조인간의 관계도 같은 인식론에서 해석 가능하다.

 

Q '포스트 인공지능(AI)' 혹은 '탈AI' 라는 담론도 탈식민주의 인식론 관점에서 충분히 형성될 것 같다.

그렇다. 수업 중 학생들에게 종종 고대나 중세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한다. 백인 귀족 남성만 인간다운 인간이고, 여성·유색 인종·식민지 원주민·어린이 등은 생물학적 인간이긴 하지만 주요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지 못했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대 이후 부르주아지로 일컬어지는 신흥 중산층이 나타나며 근대성 투쟁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투쟁의 시간을 거쳐 부르주아지에 속한 유럽 남성 중산층이 인간다운 인간으로 편입됐고 연달아 여성과 어린이, 식민지 독립 이후에는 식민지 원주민들이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렇다면 그다음 단계는 뭘까. AI, 동물, 혹은 식물 무엇이든 가능하다. 인간성의 범주라는 것이 계속 변주되고 확장되고 있다. 오히려 인간 문명의 역사에서 그 변주가 어디까지 가게 될지 또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Q 현재의 포스트휴머니즘이 인간과 AI의 투쟁 단계라고 보는가.

아직까진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언젠가 AI가 더 인간다워지거나 혹은 AI가 인간을 조정하게 돼 권력관계가 역전된다면 그런 투쟁의 시기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그런 비판적 상상력을 발휘해 볼 필요는 있다.

 

Q 종교 지배 시대에 대한 저항으로 르네상스가 태어나지 않았나.

마찬가지로 기술 지배 시대에 대한 저항으로 새로운 르네상스가 올까. 역사적으로 지배의 주체는 늘 달랐다. 그럴 때마다 인문학은 인간의 도피처가 되었다.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시대의 사람들은 구원의 수단으로 유토피아를 그린 문학에 의존했다. 인문학이 일종의 세속적인 종교였던 것이다.

근대 기술과 유럽의 제국주의가 정점에 달한 빅토리아 시대에도 사람들은 인문학에서 위안을 얻었다. 만약 미래사회에서 기술 지배와 함께 그와 관련된 모순이 여기저기서 불거져 나온다면 인간들은 어떤 도피처를 찾을까. 그게 다시 종교일 수도 있고 아니면 문학일 수도 있을 테고.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르네상스라고 명명할지는 잘 모르겠다.

 

Q 기술에도 서구 중심주의가 묻어있다고 생각하는가.

기술도 비슷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을 감싸고 있는 가장 대중적인 기술인 인터넷을 보자. 인터넷의 공식 언어는 사실상 영어이다. 우리도 모르게 영어 제국주의에 그대로 노출이 되고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런 환경은 불가피하지만 앞서 강조한 대로 비판 의식을 갖는 것과 그러지 않는 건 장기적으로 볼 때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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