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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최대 MRO 서브원, EV MRO로 진화한다

[INTERVIEW]김동철 서브원 CEO
“구매 대행 업체(Server)에서 구매 솔루션 전문가(Procurement Solutions Expert)로 거듭날 것”

  • 기사입력 2023.07.07 11:30
  • 최종수정 2023.07.07 12:52
  • 기자명 문상덕 기자

손바닥 한 뼘 길이나 될까 싶은 맷돌 손잡이. ‘어처구니’는 투박한 나무 막대에 불과하지만, 맷돌은 이것 없이 돌릴 수 없다. 한국의 메가 플랜트들에 산업재 MRO 기업의 의미도 그렇다. 수만 가지 소모성 자재를 싼값에, 적시에, 차질 없이 공장에 공급한다. 한국 최대 산업재 MRO 기업인 서브원이 가장 잘하는 일. 서브원은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에 힘입어 아시아 1위 MRO로 규모를 키웠다.
그런데 서브원은 이제 손잡이를 넘어, 날이 선 목검으로 거듭나려고 한다. 1300개 고객사, 2만 8000개 협력사와 거래하면서 축적한 데이터로 비즈니스의 날을 세워가고 있다. 고객사가 주문하기 전에 먼저 수요를 파악하고 구매를 제안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미 EV 산업에서는 실적을 내기 시작했다. 변신을 이끌고 있는 건 ‘국내 페트병 맥주의 아버지’ 김동철 CEO다.

산업재(Industrials) 생산자가 생산과정에 투입물로 쓰는 재화. 원료와 달리 가공을 거친 제품을 일컫는다.

MRO Maintenance(유지), Repair(보수), Operation(운영)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말. 원자재 및 대형설비를 제외한, 기업에 필요한 모든 소모성 자재를 말한다.

서울·하이퐁=문상덕 기자 mosadu@fortunekorea.co.kr  사진 신화섭


김동철 서브원 CEO 호주 UWS 졸업 후 1996년 필립스에서 경력을 시작. 2003년부터 오비맥주에서 총괄 수석부사장 등 역임. 2019년 5월 서브원에 COO로 합류. 2020년 서브원 CEO로 선임됐다. [사진 신화섭]
김동철 서브원 CEO 호주 UWS 졸업 후 1996년 필립스에서 경력을 시작. 2003년부터 오비맥주에서 총괄 수석부사장 등 역임. 2019년 5월 서브원에 COO로 합류. 2020년 서브원 CEO로 선임됐다. [사진 신화섭]

베트남 북부의 항구도시 하이퐁. 도시 산업단지 중 한 곳인 장줴공단을 가로지르는 2㎞ 남짓의 도로에는 ‘LG 로드’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도로 인근엔 ‘LG 하이퐁 캠퍼스’가 있다. 2013년 LG전자를 시작으로 LG디스플레이와 LG이노텍이 입주했다. 고태연 하이퐁 코참(KorCham, 한국상공인연합회) 회장은 “LG에서 2011년부터 ‘글로벌 풋프린트 스트레티지’라고 하는 생산지 최적화 전략을 구상했고, 가전을 만드는 LG는 물류 이점이 있는 하이퐁에 자리잡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현재 30여 개 협력사가 이곳에 있다”고 말했다.

서브원(SERVEONE)은 협력사 중 한 곳이다. 고객사 공장에 들어가는 각종 산업재를 구매, 공급한다. 업계에선 ‘산업재 MRO 기업’, ‘B2B 산업재 공급업체’로 불린다. MRO 기업에 구매대행을 맡기면 고객사는 핵심부품만 조달하고, 나머지 롱테일 제품은 저렴한 가격으로 적시에 공급받을 수 있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LG전자에서 TV를 만들 때 LCD 기판은 직접 조달하지만, 기판과 함께 조립하는 플라스틱제 백판은 서브원이 공급한다. TV를 포장할 때 쓰는 스티로폼, 박스, 바인더도 마찬가지다. 모두 없으면 공정이 멈추게 되는 것들이다.

서브원의 하이퐁 물류센터는 LG 캠퍼스와 마주 보고 있다. 2019년까지 LG그룹 계열사였던 서브원은 캠퍼스 조성이 한창이던 2014년, 베트남 법인을 세웠다. 2015년 매출 100억원으로 시작한 베트남 법인은 지난해 매출 3184억원을 기록, 베트남에서 손꼽히는 MRO 기업으로 성장했다. 고객사도 LG 계열사뿐 아니라 락앤락, LS CABLE, 코오롱 등 100여 곳으로 늘었다.

베트남 북부의 항구도시 하이퐁에 위치한 서브원 물류센터. [사진=서브원]
베트남 북부의 항구도시 하이퐁에 위치한 서브원 물류센터. [사진=서브원]

아시아 시장 전체로 봐도 서브원의 존재감은 크다. 지난해 서브원 매출(연결 기준)은 41억9300만 달러(5조3833억원)으로, 국내 경쟁사인 아이마켓코리아의 실적(3조5882억원)을 웃돌았다. 일본과 중국의 1위 산업재 MRO 기업인 미스미(32억4400만 달러)와 징둥공업(19억7400만 달러)과 비교해도 크게 앞선다. 아시아에서는 최대, 글로벌 업계를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규모다. 

LG와 함께 성장한 서브원은 2019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그해 5월 글로벌 사모투자펀드인 어피니티가 서브원 지분 60.1%를 6021억원에 인수했다. 시장에서는 새 회장 취임 이후 일감 몰아주기 논란을 예방하기 위한 선제 조치로 평가했다. 어피니티는 인수 직후 오비맥주의 김동철 수석부사장을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영입했다. 그는 하이트에 밀려 ‘만년 2등’으로 추락했던 오비맥주를 다시 부활시킨 주역으로 평가받는 인물. 김 COO는 1년여 뒤 서브원의 CEO에 선임됐다.

김동철 CEO가 찾은 서브원의 힘은 LG 자체가 아닌, LG와 함께 성장하며 축적한 데이터였다. 서브원 데이터베이스에 누적된 총상품 수는 700여만 개, 매월 추가되는 신규 제품은 평균 4만 개다. 2만 8000개 협력사로부터 이들 제품을 조달해 1300개 고객사에 공급하고 있다. “서브원의 데이터가 곧 시장 데이터”라는 말이 근거가 없지 않을 정도.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고객사의 수요를 예측하고 먼저 구매를 제안하는 솔루션을 내놓겠다는 것이 김동철 CEO의 구상이다.

김동철 CEO는 “자재 심부름하던 구매대행 업체(Server)에서 구매 솔루션 전문가(Procurement Solutions Expert)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철 CEO는 "서브원의 가치는 비핵심 자재에 있지 않다"며 "복잡한 조직 구조를 단순하게 해주고, 더 효율적으로 만들어주는 비즈니스라는 점이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사진=서브원]
김동철 CEO는 "서브원의 가치는 비핵심 자재에 있지 않다"며 "복잡한 조직 구조를 단순하게 해주고, 더 효율적으로 만들어주는 비즈니스라는 점이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사진=서브원]

Q 데이터 활용의 성과를 꼽자면.

기업 고객이 가격, 스펙을 비교해 산업재를 구매할 수 있는 플랫폼 ‘서브원 스토어’를 열었다. 약 700만 개 상품 가운데 가격과 거래량, 고객 선호도 등을 반영해 대표 상품 8만 개를 추렸다. R&D 전문몰 ‘G-lab’, 포장재 전문몰 ‘패커원’ 등 전문 상품 코너도 운영하고 있다.

또 서브원에 MRO를 맡기는 EV 기업이 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과 GM의 합작사인 얼티엄셀즈(Ultium Cells)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공장 셋업 단계에서부터 필요한 자재를 리스트 업 해서 제공했다. 예를 들어 에어샤워를 하고 방진복으로 갈아입는 스막(smock) 룸이 어떻게 구성되고, 필요한 자재는 무엇인지 레퍼런스를 제공하는 식이다. 이를 위해 현지 물류센터도 구축했다.

Q LG에너지솔루션과의 관계가 영향을 미쳤나?

도움을 줬다. 하지만 서브원이 공정별로 패키지(※서브원은 2021년 배터리 솔루션 패키지(BSP) 사업을 론칭하고 미국, 헝가리, 인도네시아에 진출했다)를 갖추고 접근하지 않았다면 수주가 어려웠을 것이다. 당장 완성차 업체인 GM에서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얼티엄셀즈에서 구매는 GM이 맡고 있었다. 미국 시장, 특히 구매 부문에서 GM의 위상은 한국에서의 현대차와 같은 급이다. 

GM의 구매 담당자에게 요청해서 피칭했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는데, 미팅을 한두 번 하고 공정별로 제안하겠다고 했더니 수락했다. 그만큼 우리가 강력한 도구를 갖고 있다는 뜻이라 생각한다.

Q 공정별 패키지는 무엇인가?

서브원은 LG에너지솔루션과 오래 협력해 왔다. 2016년 폴란드 공장을 지을 때 서브원도 같이 나갔다. 공장 건설부터 제품 양산까지 모든 단계에서 협업했다. 이때 배터리 생산에 어떤 제품들이 필요한지 데이터를 축적했다. 품목 가짓수만 4만여 개였다. 문제는 데이터의 질이었다. 고객사가 원하는 물건을 사다 주기만 하다 보니 4만여 개의 제품이 어느 공정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몰랐다. 배터리 공정 자체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그래서 외부 배터리 전문가를 영입, 우리가 공급하는 제품 4만여 가지가 공정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지도 그리듯 연결하는 작업을 했다. 배터리 공장에는 전극, 조립, 활성화, 패키징 4대 공정이 있고, 그 아래 15개 유닛 그룹, 그리고 그 아래 154개의 유닛 공정이 있었다. 매칭 작업에 2년이 걸렸다. 첫 1년은 2000여 품목을 수작업으로 매칭했고, 이듬해에는 인공지능 솔루션을 활용해 품목과 공정을 매칭했다. 

그렇게 매칭한 끝에 만든 것이 배터리 솔루션 패키지다. 공장을 초기 안정화하는 단계, 시제품을 만드는 단계, 제품을 양산하는 단계 각각에서, 공정별로 언제, 어떤 제품이 필요하고 재고는 얼마나 준비해야 하는지 4만여 개의 품목을 모두 관리해 준다.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서브원 평택중앙허브 물류센터. [사진=서브원]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서브원 평택중앙허브 물류센터. [사진=서브원]

Q 배터리 산업에서 패키지를 구축하게 된 이유는?

배터리 제조사는 핵심 자재를 수급해서 생산 수율을 높이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그런데 롱테일 상품들은 언제, 무엇이, 얼마만큼 필요한지 아는 기업이 드물다. 그러다 보니 작은 볼트 하나가 없어서 공정이 1시간씩 멈추는 일이 발생한다. 그런 리스크를 우리가 최소화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Q 경쟁업체에서도 비슷한 솔루션을 준비할 법한데.

고객사의 구매 패턴을 보고 살 법한 제품을 먼저 제안하는 정도는 하고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제품들에 대해서만 데이터베이스를 확보하고 제안한다. 하지만 우리와 같이 한 산업의 생산공정 전반을 파악하고 풀 패키지로 제안하는 곳은 없다. 

산업 카테고리도 늘려갈 계획이다. 연구개발을 예로 들면, 서브원에서 어떤 설비와 장비가 필요한지 알려줄 수 있다. 합성 제약을 하는 회사에 시약과 분석 장비, 실험 소모품은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알려주는 식이다. 서브원에 필요한 품목과 가격 정보까지 데이터가 모두 있다. 이 외에도 고객사를 16개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군별로 패키지를 내놓을 계획이다.

Q 아시아 시장에서 한국 기업이 가장 크다는 게 의외였다. 중국과 일본은 한국 이상으로 제조업이 강한 나라 아닌가?

MRO 시장이 클 수 있는 철학적인 백그라운드는 세 가지다. 한국처럼 소수 대기업을 중심으로 산업이 중앙집권화 돼 있거나 구매, 조달에 투명성이 요구되는 사회적 분위기, 비용에 대한 압박이 커지는 경우다. 중국은 2014년 정부가 투명성 강화 정책(양광구매정책,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 기관, 공공기업 및 사회단체 구매 관리에 대한 규정’)을 발표하면서 시장이 커지기 시작했다. 모든 공기업은 MRO나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서 물품을 구입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본은 사업 관습 때문인지 MRO 산업이 비교적 낙후돼 있다. 주요 기업도 로컬을 베이스로 하고 있고, 보통은 구매팀을 회사 안에 두고 물품을 조달한다.

중국 지역은 서브원 해외 매출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사진=서브원]
중국 지역은 서브원 해외 매출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사진=서브원]

Q 성장세를 보면 중국에 힘을 줄 수밖에 없어 보인다. 전체 매출에서 중국 비중(24.01%)이 한국 다음으로 많다. 2019년 이후 연평균 매출 신장률도 두 자릿수(10.37%)다. 시장 전체 규모도 엄청나다. 서브원 측 분석에 따르면 2021년 중국 MRO 시장 규모는 398조원에 달했다. 

미중 갈등 때문에 우려가 없지는 않다. 중국에서 철수하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 아직 수많은 글로벌 기업이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고, 중국의 인프라와 노동력에 대한 전문성은 다른 나라에서 따라잡기 쉽지 않다. 또 중국 시장 자체의 수요가 어마어마하다. 다만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 현지 회사와 협업하는 방안 등을 찾고 있다. (※서브원은 지난해 9월 중국의 산업재 MRO 전문기업 진순심(晉順芯, JSX)과 조인트벤처 회사인 ‘신치(芯崎)’를 설립했다. 진순심은 중국 최대 민영 택배물류 회사인 순펑(顺丰)의 관계사다.)

Q 베트남처럼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를 보면, 공급망 현지화에 대한 요구가 많은 것으로 안다.

저희도 해외에 나갈 때 현지 공급망을 가장 우선적으로 본다. 중국에서도 현지화 노력을 많이 한다. 베트남은 조금 다르다. 현지화를 하고 싶어도 아직 제조업 수준이 충분하지 않다. 현지에서 물품을 제공할 수 있는 협력사도 드물다. 가능하다면 베트남 정부와 파트너십을 맺어서 현지 협력사를 발굴하고 키우는 일을 하고 싶다. 

Q MRO 산업은 비핵심 자재를 구매하고 공급하는 것이지 않나. 게다가 B2B 비즈니스다. 최종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주류회사만큼 매력적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2019년 서브원에 오기로 결심했을 때 생각했던 MRO 산업의 본질은 무엇인가? 

비핵심 자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서브원의 가치는 비핵심 자재에 있지 않다. 복잡한 조직 구조를 단순하게 해주고, 더 효율적으로 만들어주는 비즈니스라는 점이 핵심이다. 서브원은 반복적인 구매 업무에 들어가는 리소스를 아껴서 회사의 성장 전략에 투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다시 말해 MRO는 비용을 절감하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비즈니스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보면 전 세계의 모든 회사가 서브원의 잠재고객이다. 그만큼 성장성이 크다고 봤다.

Q 개인적인 판단의 순간도 궁금하다.

어피니티와 3시간 동안 대화했고, 귀가해서 2시간 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얼마나 고민했는지, 2시간 지나고 나서 보니 두드러기가 생겨 있었다.

서브원을 선택한 이유는 이랬다. 앞으로 또 다른 도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까. 전혀 다른 산업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올까. 오비맥주에서 다른 주류 회사로는 갈 수 있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사업모델을 가진 분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신나는 일이기도 했다. 전혀 해보지 않았던 업무였다. 그동안 B2C를 주로 경험했는데, B2B에서도 성공 사례를 만들어낸다면 더 보람 있겠다고 생각했다. 도전을 안 할 이유가 없었다.

Q 산업의 성격은 다르지만, 2003년 오비맥주와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현재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상황. 당시 하이트에 밀리긴 했지만 2위 자리는 공고했다. 서브원 역시 사모펀드에 매각되긴 했지만, 여전히 막대한 LG 물량을 소화하고 있었다.

2000년 초반까지 주류업계는 하이트와 오비맥주가 시장을 양분했다. 굳이 새롭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식이 없었다. 오비맥주 점유율이 30%대로 떨어졌지만, 마진율은 여전히 높았다. 그러니 원래 있던 사람들은 상황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밖에서 온 사람들은 새롭게 해봐야 한다고 했다.


1993년 5월 하이트가 처음 시장에 나왔을 때 시장 구도는 동양맥주(현 오비맥주)가 70%, 조선맥주(현 하이트진로)가 30%였다. 하이트는 신제품 출시 3년 만인 1996년에 시장 점유율 43%로 동양맥주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이때 하이트가 내세웠던 마케팅 문구는 ‘지하 150m 천연 암반수’였다. 1위 자리를 내준 오비맥주는 1999년 11월 진로그룹의 부실로 경영난을 겪던 카스(진로쿠어스)를 인수하는 등 변화를 모색했지만, 점유율은 2004년 상반기 39.3%까지 추락했다.


오비는 추락하고 있었고, 카스는 시장 점유율이 낮았지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회사 자원의 대부분을 오비에 투자하고 있었다. 많은 브랜드가 사실 이렇게 떨어지는 칼날을 놓지 못해서 실패한다. 오비도 그런 전철을 밟을 것인가, 아니면 카스를 키울 것인가. 저는 판을 바꾸자고 했다.

Q 경영진에서 쉽게 동의하진 않았을 것 같다. 어떻게 설득했나?

모든 설득은 합리적이어야 한다. 데이터에 근거한 합리성이 있어야 한다. 명확한 데이터가 많았다. 성과와 소비자지표. 맥주는 젊은 사람이 많이 먹는다. 그렇다면 젊은 사람의 맥주 선호도와 브랜드, 그리고 이들이 생각하는 브랜드 이미지는 뭔지 분석했다. 우리가 2~3년만 비즈니스를 하는 게 아니라 향후 수십 년을 해야 하는데,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 OB라는 전통적인 이미지로는 왜 안 되는지. 카스라는 브랜드는 왜 되는지를 설득했다.

당시 오비맥주 경영진은 제 제안에 공감했다. 이후 투자 비중이 9대 1에서 3대 7로 바뀌었다. 

Q 국내 첫 페트병 맥주, ‘OB 큐팩’ 개발을 이끌기도 했다.

맥주는 여러 사람이 함께 먹는 성격이 강하다. 보통 술집이나 고깃집에서 병맥주를 시켜 먹는데, 그러면 그 외의 장소에서는 어떤 패키지를 쓸 수 있을까. 그 지점이 빈 공간으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전략적인 판단을 했다. 그리고 기존에는 브랜드 이미지를 바꿀 때 패키지를 유지하면서 디자인만 바꿨는데, 새로운 패키지를 등장시키면 이미지를 확실하게 각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투자의 무게중심을 바꿀 수 있을까. 실적에 도움이 될 수 있어야 설득할 수 있다. 페트병은 하나에 1.6L다. 355ml 캔 대비 하나만 팔아도 볼륨이 훨씬 더 많이 나오고 이익이 더 많이 나온다. 결론은 새 패키지를 내면 브랜드에는 새로운 이미지를 주고, 회사에는 새로운 채널을 열어주는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었다. 두 가지 모두 노릴 수 있었던 혁신이었다. 

Q 새로운 패키지를 들여오려면 뒷단의 밸류체인까지 바꿔야 한다. 

주류산업은 장치산업이다. 라인부터 페트 재질, 페트 품질 검수 등을 다 해야 한다. 1년 동안 계속 실험하고 실패해 가면서 패키징을 완성해서 출시했다. 예를 들어 페트병 맥주 밑을 보면 울룩불룩하게 돼 있다. 생수 페트병과 다르다. 맥주는 탄산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더워도, 막 움직여도 내압을 견뎌야 한다. 그 설계도 산업공학이다. 뚜껑도 병 안의 산소를 흡수해 산화를 막는 스캐빈저 캡을 처음 적용했다. 1초에 약 1만 개씩 생산하는 양산 과정도 조정했다.

Q 가만히 둬도 2등은 지킬 수 있는 기업이었다. 왜 1등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나?

1등은 어떤 상태나 자리가 아니다. 1등이라는 자존감과 자신감, 다르게 말하면 ‘이길 수 있다는 마인드’가 1등의 본질이다. 이런 마인드가 있다면 끊임없이 변화하고 혁신한다. 그리고 전략을 만들어낸다. 그 전략을 바탕으로 아이디어와 이니셔티브가 나온다. 2등에 안주하면 따라갈 수 없다. 오비맥주가 하이트를 다시 역전할 수 있었던 건 이길 수 있다는 마인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프라이드라는 말을 좋아한다. 회사에 대한 프라이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자기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라고 직원들에게 말한다. 그게 없으면 영혼과 삶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김동철 CEO는 “1등은 어떤 상태나 자리가 아니”라며 “1등이라는 자존감과 자신감, 다르게 말하면 ‘이길 수 있다는 마인드’가 1등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사진 신화섭]
김동철 CEO는 “1등은 어떤 상태나 자리가 아니”라며 “1등이라는 자존감과 자신감, 다르게 말하면 ‘이길 수 있다는 마인드’가 1등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사진 신화섭]

Q 누구든지 2등의 자리에 오래 있다 보면 안주하게 된다. 그 마음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조직에서 중요하고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바로 변화다.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의 수혈, 그 다음에 다른 조직 문화를 새롭게 적용하는 것. 저는 주사 공법이라고 표현한다. 직원들 코칭을 할 때 때로는 굉장히 날카롭게 코치한다. 1대1로 코치할 때 직원이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이면 그렇게 한다. 직원들은 ‘주사 한 방 맞고 나왔다’고 표현한다. 

제가 코치하고 나면 한 3~6개월 동안 그 직원은 풀 에너지를 갖고 일한다. 새로운 조직 문화도 이렇게 주사를 놔줘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투입해 줘야 한다. 똑같은 사람, 똑같은 구조, 똑같은 프로세스를 가지고 무언가를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Q 서브원의 대표로서 목표하는 바에서 지금 어디까지 왔다고 보나?

1에서 100이라고 한다면 한 30쯤 온 것 같다. 실질적 성과만 보면 10 미만이다. 그럼에도 30까지 왔다고 말하는 이유는 저희의 전략과 방향성이 셋업이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 3년 동안 서브원에 대한 정체성, 업에 대한 재정의를 했다. 우리가 어떻게 가치를 창조하고 구매 솔루션 엑스퍼트가 될지 수도 없이 고민했다. 이제 비로소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고 어떻게 해야 될지 정의가 내려진 것 같다. 이제 계획대로 하면 된다.

Q 구체적으로 정리한다면.

과거 구매 대행으로서 제품을 적시 적소에 제공해 주는 서비스를 제공했다면, 앞으로는 구매 솔루션 전문가로서 서비스를 고도화하는 것이 큰 방향이다.

새로운 정의를 갖고 성장을 이야기한다면, 크게 세 가지다. LG를 넘어 다른 대기업, 그리고 다양한 규모의 기업을 고객사로 만들고, 글로벌 진출을 가속화하고, 필요할 땐 인수합병을 하자는 것이다. 

성장은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을 포괄한다. 특히 미국과 유럽을 보면 향후 20년 동안 배터리를 포함해 EV 밸류체인이 어마어마한 생태계를 만들어낼 것이다. 거기서 저희가 추구하는 포지셔닝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EV MRO 솔루션의 넘버원, 최고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WHY? 김동철

서브원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부가가치 낮았던 MRO(비핵심자재 납품) 비즈니스 기업이 산업 생태계에서 적극적인 플레이어로 그 역할을 강화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서브원은 우선 단순 비핵심자재 공급자의 역할에서 필요자재를 적시 추천, 공급했다. 디지털 대전환을 통한 수요 예측 시스템을 통해서다. 시장 확대를 위해 미래산업을 연구해 생태계를 직접 만들어가기 시작한 점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EV 산업을 눈여겨 본 김동철 대표는 외부 배터리 전문가를 영입해 각 공정별 제품을 연구, 지도를 그렸다. 서브원은 2년의 연구개발 과정을 통해 공정별 패키지를 도입, EV 배터리 제조공정의 4만개 품목을 공급하고 있다.

디지털과 데이터의 힘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한 서브원. 특히 베트남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서브원의 활약을 직접 기자의 눈으로 확인했다. “자재 심부름하던 구매대행 업체에서 구매 솔루션 전문가로 거듭날 것”이라는 김동철 대표의 말은 사실이다.

취재기를 듣고 생각하는 김동철을 상상했다. 그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라이카로 김동철의 호기심을 담아보고 싶었다. 그의 어떤 상상이 기업을 성장시키고 있을까. 서브원을 이끌고 있을까. 카메라 앞 김동철은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지식인의 고뇌를 카메라에 담으려 했는데 라이카로 본 김동철 대표는 즐거워 보였다. BY LE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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