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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춘US] 바이오가 빅데이터와 만났다

  • 기사입력 2018.05.02 10:04
  • 최종수정 2018.09.21 12:42
  • 기자명 Mukherjee 기자

이 기사는 포춘코리아 2018년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미국 의료제도가 붕괴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과연 고품질의 데이터와 이를 활용하는 능력이 미국 의료계를 구할 수 있을까? 기술업계의 ’거대한 차세대 흐름‘을 포춘이 심층 분석했다. By ERIKA FRY and SY MUKHERJEE



시작은 작년 12월이었다. 드러그스토어 체인 CVS가 보험사 에트나 Aetna를 690억 달러에 인수하겠다고 제안하면서부터였다. 1월이 되자 아마존과 JP모건 체이스, 버크셔 해서웨이 Berkshire Hathaway 세 대기업이 합작 벤처를 세운다고 발표했다. 합계 약 100만 명에 달하는 직원들의 의료비를 낮추고 효과를 제고하기 위해서였다. 3월에는 보험업체 시그나 Cigna가 약제비 관리 전문회사(pharmacy benefits manager · PBM)/*역주: 처방약의 적합성 여부를 검토한다/ 익스프레스 스크립츠 Express Scripts를 500억 달러가 넘는 가격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의료계에서 굵직한 발표가 잇따르는 이유는 뭘까? 얼핏 보면 시장이 크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 있다. 경영인들의 표현을 빌자면 ‘규모’를 쫓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훨씬 더 강력한 요인이 숨어 있다. 수수께끼의 해답처럼, 너무나 거대하면서도 너무나 작은 ‘그것’은 바로 데이터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러분들의 데이터다. 개인의 생물학적 특성, 건강 이력, 시시각각 변하는 웰빙 상태, 가는 곳, 지출 내역, 수면 상태, 식사와 배설 등에 관한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매일 생성되고 있다. 그 형태도 연구소 실험 기록, 의학 영상, 유전정보, 액체생체검사, 심전도 등 실로 다양하다. 여기에 보험금 지급 청구서, 임상시험, 처방전, 학계 연구 등이 더해지면서 매일 750경 바이트의 데이터가 생성되고 있다. 전 세계 데이터 발생량의 30%다. 이 거대한 정보의 저장고는 과거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일련의 신기술, 정밀해진 측정 장치, 일상 곳곳에 보편화된 연결성, 클
뒷뜰에서 아들 저코비와 놀고 있는 린지 에이머스. 사진=US 포춘
라우드, 거기에 인공지능(AI)까지 덧붙여져 기업이 데이터를 활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길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확대됐다. 스크립스 중개과학연구소(Scripps TranslationalScience Institute)의 에릭 토폴 Eric Topol 소장은 “단지 데이터 자체에 그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요한 건 분석이다. 3~5년 전까지만 해도, 데이터는 각자 제 자리에만 있었다. 이제는 분석과 해석이 이뤄진다. 의료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극적인 변화다.”

데이터를 획득, 분석, 활용하려는 움직임은 ‘새로운 골드 러시’라고 부를 만하다. 한창 뜨는 벤처기업들이 몰려든 것은 물론, 거대 IT기업들도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구글의 모기업인 알파벳의 생명과학 전문 자회사 베릴리 Verily는 자원자 1만 명의 모든 생체정보를 추적해 인간 건강의 ‘기준선’을 만들고 있다(이 회사가 의료보험 시장에 관심 있다는 소문도 있다). 애플의 신형 아이폰은 몇몇 대형 의료기관 환자를 대상으로, 본인의 의료기록에 즉시 접근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애플은 스탠퍼드 대학과 공동으로 웨어러블 기기가 중증 심장질환을 감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연구를 하고 있다.

미국 메디케어 및 메디케이드 서비스 센터(Centers for Medicare & Medicaid Services)에 따르면, 미국의 의료비는 2018년 한 해에만 전년 대비 5.3% 증가할 전망이다. 많은 이가 의료 비용을 낮추고, 환자의 건강을 개선할 궁극적 수단으로 데이터의 보고(寶庫)에 주목하고 있다. 고귀한 열망이다. 그러나 사업적 전망이 엄청나다는 확신도 큰 영향을 끼쳤다. 회계법인 BDO의 데이비드 프렌드 David Friend 매니징 디렉터는 (데이터가 풍부한) 페이스북과 구글의 현재 주 수익원이 광고임을 지적했다. 그는 광고 시장의 규모를 2,000억 달러로 추정한다. “보건 산업은 그보다 15배는 더 크다. 3조 달러 규모다. 이론상으론 페이스북 15개와 구글 15개가 탄생할 수 있다. 도전자들이 나오는 이유다.”

그래서 병원, 보험사, PBM, 제약사, 의료기기 업체 등 의료계-미국 경제의 5분의 1을 차지한다-의 수많은 기업이 재조직과 재혁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들의 목표대로 업계 지형이 근본적으로 변한다면, 기업뿐만 아니라 소비자도 큰 영향을 받게될 것이다.

컨설팅 업체 액센추어 Accenture의 최고기술혁신책임자(chief technology andinnovation officer) 폴 도허티 Paul Daugherty는 변화를 낙관한다. “정보 비대칭성” 덕분에, 자신의 생물정보 소유권을 지닌 환자에게 새로운 힘이 생길 것이라 전망한다. 

앞으로 의료계 힘의 균형이 어떻게 바뀔지, 현재 상황은 어떤지 파악하기 위해 포춘은 의료기업 임원 40여 명과 기업인, 의사, 환자, 기타 전문가들을 만났다. 지금부터 빅데이터 혁명이 의료계를 어떻게 바꾸고, 또 바꾸지 못할 것인지 살펴보자.

▲데이터 알약: 환자를 위한 새 패러다임

덴버 시 교외에 사는 린지 에이머스 Lindsay Amos는 아들 저코비 Jacoby의 여덟 살 생일이 다가올 무렵, 이상 징후를 알아차렸다. 평소 아이스하키와 라크로스를 즐기던 활발했던 아들의 움직임이 둔해졌고, 화장실에 가는 일도 잦아졌다. 저코비를 진찰한 의사는 혈당수치를 확인한 후, 당장 응급실에 가라고 말했다. 응급실로 가는 차 안에서 아이는 의식을 잃었다 깨길 반복했다. 당시 저코비의 혈당 수치는 정상 범위인 70~140mg/dL보다 훨씬 높은 735mg/dL이었다. 당뇨병성 케톤산증(DKA)을 피한 게 다행이었다. DKA는 높은 혈당수치가 계속될 경우 발병하는 질환으로, 혈액의 산화와 장기 기능 정지를 유발해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에이머스가 이 충격적인 사건에 관해 안내 받은 대책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단순하고 모호했다. 에이머스 가족은 1형 당뇨병, 그리고 혈당수치가 너무 높거나 낮을 때의 위험성에 대해 간단한 교육을 받았다. 가족은 저코비의 탄수화물 섭취량을 확인하고, 매일 손가락을 당뇨 검사기로 따서 혈당수치를 재야 했다. 이후 모든 기록을 수기로 남겼다.

스트레스, 운동, 인슐린, 각종 음식을 관리하고, 그 외 수많은 요인이 혈당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해 조절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저코비의 건강을 정상 범위로 유지하는 건 힘들고도 두려운 일이었다. 에이머스는 열심히 수치를 계산했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는 듯했다. 아이의 몸 상태는 극과 극을 오갔다. 혈당 수치는 위험할 정도로 치솟았다가(피곤할 때), 갑자기 극단적으로 낮아졌다(졸릴 때).

혈당 수치는 저코비의 생명이 달린 문제였다. 에이머스는 아들의 혈당 수치를 계속 확인하고 싶었다. 아이가 당뇨병 진단을 받은 후 첫 몇 주간, 하루에 약 20번씩 혈당 수치를 재는 등 최선을 다했다. 보험사의 검사지 지원 한도를 훌쩍 넘긴 횟수였다.

예전에는 미국 전역에서 수백만 가족이 당시의 에이머스와 같은 두려움을 경험했다. 하지만 2015년 등장한 스마트폰 기술이 이들의 걱정을 조금 덜어주었다.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덱스컴 Dexcom이 혈당을 지속적으로 측정하는 기기(10년 잇상 전에 나온 기술이다)와 스마트폰(혹은 스마트워치)을 무선으로 연결했다. 이제 5분 간격으로 측정된 혈당 수치를 그래프로 정리하고,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게 됐다. 환자가 위험에 처하면 즉시 알람이 울린다.

이런 상시적 측정 장치가 환자들에게 과도한 정보를 준다고 생각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그러나 에이머스는(아들의 혈당 수치를 “스토킹한다”고 농담하면서도) 이 장치가 생명을 구해준다고 이야기한다. 덕분에 저코비가 다시 평범한 3학년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이는 이제 매일 여러 번 교실 밖 보건실로 갈 필요 없이, 애플워치로 혈당 수치를 확인할 수 있다(에이머스도 아이폰으로 이를 확인한다). 혈당 측정 간격을 맞추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손가락을 딸 필요도 없다. 저코비는 요즘 아침까지 푹 자고 있다.

이 기기의 이점은 마음의 평화를 얻는데 그치지 않는다. 에이머스와 저코비 모자는 기기의 데이터를 활용, 당뇨병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법을 익혔다. 어떤 음식을 먹으면 혈당 수치가 오르는지, 피자 같은 복합 탄수화물을 먹었을 땐 언제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하는지 파악했다. 데이터가 당뇨를 치료해 주진 않았다. 하지만 혈당 변화를 예측할 수 있게 됐고, 알람이 울리는 일도 드물어졌다. 놀랍게도 이 기술은 에이머스 가족의 일상 속에 완전히 자리잡았다. “안전벨트나 자전거 헬멧과 다름없다.” 에이머스의 말이다.

GE 헬스케어가 설계한 존스홉킨스 병원 ’수용력 통제 센터‘의 내부. 사진=US 포춘
이 일화는 의료기기와 스마트폰 간 연결 덕분에 환자와 환자의 의료정보 간 관계가 변화한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이처럼 신기술은 환자 건강을 개선할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버타 Virta, 오마다 Omada 같은 디지털 당뇨예방 및 치료 플랫폼은 당뇨 환자를 지원 단체 및 건강 코치(health coach)와 연결해 준다. 건강 코치는 체중, 혈당, 식단, 투약량 등을 원격 모니터링할 수 있는 건강 전문가다. 한편 프로테우스 디지털 헬스 ProteusDigital Health는 알약형 센서를 출시했다. ’블랙 미러‘ Black Mirror/*역주: 영국의 SF사회풍자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 센서는 환자의 약 섭취 여부를 기록하고 있다(환자가 원한다면 의사와 가족도 기록에 접근할 수 있다). 이 센서는 약이 위산에 닿을 때마다 앱에 알림을 보낸다. 프레이더트 & 위스콘신 의대 병원의 최고혁신디지털책임자(chief innovation and digital officer) 마이클 앤더러스 Michael Anderes의 표현을 빌면, 이는 치료가 게임이 되는 순간이다. 프레이더트는 길리어드 Gilead의 하보니 Harvoni 같은 고가 치료제에 의존하는 C형 간염 환자들에게 이 센서를 지급했다. 센서 도입 이후 복약 지도 준수율이 무려 98.6%에 이르렀다. 복약 지도를 따르면 치료의 효과성만 높아지는 게 아니다. 약을 1개월 더 복용하면 보통 수만 달러 비용이 드는데, 이 비용도 절감되는 효과가 있다. (환자가 아닌) 프레이더트가 센서 비용을 부담하는 이유다.

애플워치나 안드로이드 기반 기기 등 웨어러블 건강 트래커는 불면증·고혈압부터 중증 심장부정맥까지 수많은 질병에 알람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변화한 인식을 게놈 분석-현재로선 완벽하지 않고 논란도 존재한다-에 적용해 암이나 알츠하이머 같은 특정 질병의 발병 가능성을 측정하는 기술도 있다. 컬러 지노믹스 Color Genomics, 23앤드미 23andMe 등 의료벤처들이 출시한 유전자 검사 키트도 가격이 꾸준히 낮아지고 있다. 이들은 사용법도 간단하다. 낙관론자들은 “이 같은 방법을 통해 각자 자신이 어떤 질병에 유전적으로 취약한지 알게 되면, 예방적 행동을 취하게 돼 리스크가 줄어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정용 유전자 검사는 갑자기 인기가 오른 상품이다. 작년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 기간에는 23앤드미의 DNA 테스트 기본형이 아마존 최다판매 순위에서 AI 스피커인 에코 닷 Echo Dot, 즉석 주전자 압력쿠커 등을 바짝 뒤쫓으며 5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 변혁적 기술들은 한 가지 단순한 매력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바로 소비자가 기술을 주도한다는 점이다.

일부 대형 보험사들은 환자 자신이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으면, 의료 효과가 높아지고 비용도 통제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에트나의 마크 버톨리니 Mark Bertolini CEO는 이런 인식을 기반으로 투자를 진행했다. 드러그스토어 CVS와의 협력 시도도 그 일환이라 할 수 있다. 고객이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어떤 혜택을 얻을 수 있는지 기업이 입증한다면, 고객이 자기 데이터를 공유할 수 있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이를 요구할 것이라는 게 에트나의 판단이다. 버톨리니는 “우리는 데이터 보호를 위한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반대로 고객에게 ‘정보를 알려주면 일이 훨씬 편리해진다’고 말하면, 고객은 정보를 공유할 것이다. SNS도 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

개인화된 정보를 확보한 회사는 고객과 함께 맞춤형 보험을 만든다. 버톨리니는 “환자와 회사가 함께 설계한 보험에는 가입자 부담금이나 지급 승인이 필요 없다”며 “그 이유는 같이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앙 통제: 데이터를 통한 의사결정 개선

홍보업체 CEO 로드니 M.(52)은 아내의 생일선물을 고르던 중 갑작스런 통증을 느꼈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고 앉을 곳을 찾았다. 허리 아래 감각이 사라지고 마비된 느낌이었다. “트럭에 치인 기분”이었다.

로드니는 암 치료를 받고 2년째 병이 호전 중이었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의료 악몽이 시작된 것이었다. ‘대동맥 박리(aortic dissection)’라는 이름의 이 질환은 신체에 혈액을 공급하는 핵심 혈관이 파열되면서 발생한다.

로드니는 운이 좋았다. 신속하게 도착한 구급차가 그를 메릴랜드 주 컬럼비아에 위치한 하워드 카운티 종합병원(Howard County General Hospital)로 이송했다. 대동맥 박리 환자는 5명 중 1명 꼴로 병원 도착 전 사망한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몇 분 후, 로드니는 헬기를 타고 볼티모어의 존스홉킨스 Johns Hopkins 병원으로 이송됐다. 그리고 7시간에 걸친 대수술 끝에 결국 살아남았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로드니의 생명을 구한 데에는 존스홉킨스의 인공지능 기반 데이터 ‘통제센터(command center)’의 역할이 컸다. 최근 확장 중인 존스홉킨스 응급의료 부문을 맡고 있는 짐 슐런 Jim Scheulen 최고행정책임자(chief administrative officer)는 “41분, 병원에서 수술을 준비하는 데 딱 그 만큼이 걸렸다”고 말했다.

통제센터는 10개 이상의 데이터 흐름에서 실시간으로 정보를 받고 있다. 환자 건강기록, 응급의료 파견 서비스 현황, 연구 결과, 특정 시점의 잔여 병상 수 등이다. 인간에게 교육 받은 알고리즘이 
암세포를 연구하는 BERG 소속 과학자. 사진=US 포춘
환자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순식간에 판정한다. 로드니의 경우처럼 수술팀을 사전에 준비시키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병원 입장에서 보면, 데이터 경영은 확실히 재무적 장점이 있다. “존스홉킨스의 경우, 2016년 통제센터를 개설한 이후 고난이도 암환자 입원을 허가할 수 있는 역량이 약 60% 증가했다. 응급실 대기자(응급실 병상이 비길 기다리는 사람)도 25%나 줄었다. 수술 대기자도 60%나 감소했다.” 존스홉킨스 통제센터를 건립한 GE 헬스케어에서 유사 프로젝트들을 감독한 제프 테리 Jeff Terry의 말이다. 슐런은 존스홉킨스가 신기술 덕분에, 실제 병실 추가 없이 15~16개 병상을 추가한 효과를 봤다고 설명했다. GE는 올해 30개 병원을 대상으로, 통제센터 10곳을 추가 건설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테리는 이들 병원이 통제센터 건립에 투자한 금액과 관련해 “향후 5년간 투자 대비 4배의 이익을 올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보단 덜 화려하지만 잠재적 영향력이 더 강력한 변화도 있다. 빅데이터를 통한 기존 기술의 획기적 개선인데, 그 중 전자건강기록(EHR)이 대표적이다.

의료계에서 EHR만큼 악명 높은 기술은 없다. EHR은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고, 다른 의료기록 시스템과 호환성이 떨어지고, 환자가 이해하기 거의 불가능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2015년 이후 무려 593건의 학계 저술과 1건의 랩 음악 영상이 EHR과 의사의 소진증후군 간 연관성을 다뤄왔다. 시간을 잡아먹던 전자건강기록을 쓸 만한 연구 수단으로 바꾸고 있다는 점에서 빅데이터의 진가가 드러나고 있다.

미시간 주 남서부에 위치한 지역기반형 비영리 의료기관 레이클랜드 헬스 LakelandHealth의 사례를 보자. 레이클랜드는 2012년 EHR을 도입했는데, 당시엔 종이와 펜이 없으면 무용지물이었다. 간호사들은 환자의 생체신호를 차트에 적은 후, 사무실로 돌아가 병원 EHR에 일일이 수치를 입력해야 했다. 입력에 15~20분씩 걸리고, 오류도 잦았다. 2016년 중반, 레이클랜드는 영국-네덜란드계 대형 의료기업 필립스가 개발한 신형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 결과 이젠 데이터를 환자의 손목밴드에서 자동 업로드하거나, 간호사가 병실에서 휴대용 장비로 입력하는 게 가능해졌다.

도입 초반부터 한 가지 변화가 두드러졌다. 레이클랜드의 최고간호정보과학책임자(chief nursing informatics officer) 아서 베이러지 Arthur Bairagee의 말처럼, 간호사가 데이터 입력 대신 환자에 쏟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나 더 강력하고 놀라운 변화는 따로 있었다. 환자의 심혈관 및 호흡 정지를 알리는 ’코드 블루 code blues‘가 줄어든 것이었다. 2016년 6월 새 시스템을 도입한 이후, 코드 블루는 무려 56% 감소했다. 원인은 모니터링 기술에 탑재된 AI기반 경고 시스템이 생체신호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해냈다는 데 있었다. 또, 환자 별 위험지수가 산출돼 간호사들이 위험한 환자부터 돌보는 게 용이해졌다.

필립스의 전략 및 혁신담당 최고의료책임자 로이 스마이스 Roy Smythe는 “현 상황에 대해 솔직하고 현실적인 태도를 취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새롭게 출시된 디지털 및 데이터 도구 대다수는 현재 직접 의료를 제공하는 수준까지 도달해 있진 못하다. 더 똑똑하고, 효율적이고, 정확하게 인간의 의료행위를 돕는 보조 수단에 가깝다.

스마이스는 의료 신기술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경계했다. 포춘이 인터뷰한 많은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디지털 의료 극찬론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다스-시나이 Cedars-Sinai 병원의 내과의사이자 의료서비스연구 책임자 브레넌 스피걸 Brennan Spiegel은 “비전은 거창한데, 실천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나는 기술에 회의적인 기술 애호가다. 요즘 실리콘밸리에는 환자에 손 한번 댄 적 없고, 디지털 의료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UCLA의 의학 및 공중보건학 교수이기도 한 스피걸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유명 실패 사례를 언급했다. 지난 2015년 세다스-시나이는 핏비트, 애플워치, 위딩스 Withings 등 웨어러블 기기를 통해 환자와 전자건강기록을 연결하려 했지만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그는 “환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에 아쉬움이 있었고,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도 최고가 아니었다” 며 “잠재적 참가자들이 가시적인 가치 제안이 없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동기를 느끼지 못했다. 디지털 의료는 컴퓨터과학이나 공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이자 행동과학”이라고 말했다.

저명한 심혈관 전문의의기도 한 스크립스의 에릭 토폴도 유사한 경고를 남겼다. “장밋빛 약속은 넘쳐나는데, 정작 실현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유는 여러 구조적 장애물 때문이다. 미국 의료기관의 경직성과 ’노쇠‘도 그 중 일부이다(미국의 의사는 절반이 50세 이상이다). 이들은 “보상이 올라가지 않는 한” 기존 방식의 변화에 반발한다.

▲’실패 문제‘의 극복

캘리포니아의 바이오기술 기업 암젠 Amgen에선 빅데이터가 신약 개발 과정을 뿌리째 뒤엎고, 후보 물질군의 모습도 크게 바꿔놓았다. 이 같은 일은 R&D를 총괄하는 션 하퍼 Sean Harper가 아이슬란드 출장을 다니기 시작한 2011년 시작됐다. 그의 목표는 회사(와 업계)의 고민인 ‘실패 문제(failure problem)’ 해결하는 것이었다. ‘실패 문제’란 신약 후보물질의 90%가 시장 출시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현실을 뜻한다.

신약 개발은 매우 고비용이면서도 효율이 낮다. 제약사는 가능성 있는 과학적 가설 하나를 검증하는 데 수 년간 몇 십억 달러를 투자하곤 한다. 학자들은 자신이 표적(target)으로 삼은 생물학적 기전이 얼마나 복잡한지, 혹은 쥐 대상으론 그토록 효과가 좋았던 약이 왜 사람에겐 안 통하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화학적 우연이 발생하길 바라고 있다.

하퍼는 아이슬란드의 건강 데이터가 다른 곳보다 질적으로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아이슬란드 정부는 국민 16만 명의 유전자 시퀀스, 의료 기록, 가계도를 수집해 보유하고 있었다. 이 데이터의 저장과 분석은 레이캬비크에 본사를 둔 인간유전학 전문기업 디코드 deCode가 1996년 창립 때부터 관리하고 있었다. 2011년 당시 이 회사는 재정 문제로 고전을 하고 있었다.

파산 위기를 맞았지만, 디코드는 유전학적 발견을 외부에 활발히 공개했다. 관리 중인 데이터에서 유전적 변이를 찾아내 암부터 조현병까지 여러 질병의 임상 결과와 연결시켰다. 컴퓨터 처리 능력의 상승으로 염기서열 분석 비용이 급감했기 때문에 하퍼는 신약 개발 측면에서 디코드의 가치가 저평가됐다고 판단했다. 암젠은 2012년 디코드를 4억 1,500만 달러에 인수했다.

이 인수는 암젠의 R&D 과정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디코드 인수 이전에는, 암젠의 후보 분자 중 15%만이 특정 표적에 대한 효과를 검증 받았다. 암젠은 인수 후 모든 후보물질을 디코드 데이터베이스에 기반해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실패작들이 밝혀졌다. 신약후보 분자 중 5% 정도는 효능이 없다는 증거가 나왔다. 경영진은 해당 물질들의 개발을 중단했다(큰 기대를 모으며 인간 대상 임상시험을 앞두고 있던 관상동맥 관련 후보물질도 예외는 아니었다). 반대로 표적이 유전적으로 명확한 물질들은 우선 순위에 올랐다. 암젠은 디코드의 유전 데이터가 검증한 후보물질 10여 종의 개발을 허가했다.

하퍼에 따르면, 현재 암젠이 개발 중인 신약후보 중 4분의 3은 디코드 데이터베이스에서 획득한 발견에 근거하고 있다. 회사는 이미 디코드에 투자한 금액 이상의 이익을 올릴 수 있다.

그렇다고 표적효능의 유전학적 검증이 성공의 보증수표는 아니다. 표적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방법 등 각종 생물학적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개발 난이도가 낮아진 건 사실이다. 하퍼는 “수익률이 50% 오른다면 엄청난 것”이라고 말했다.

암젠이 디코드를 인수할 무렵, 바이오기술 기업 리제네런도 디코드와의 파트너십을 추진하고 있었다. 전략은 암젠과 유사했다. 그러나 이 회사는 외부 조직을 인수하는 대신, 자체 연구를 선택했다. 4년 전 설립된 리제네런 유전학 센터(Regeneron GeneticsCenter · RGC)는 엑솜(유전체의 단백질 서열)을 최대한 많이 분석하고, 이를 의료기록과 비교해 의약품 개발을 촉진하려 하고 있다.

리제네런의 게놈 바이오정보과학 부문 수장 제프 리드 Jeff Reid는 “유전학이 의약 R&D에 끼칠 파급효과에 많은 이들이 주목한다”며 “하지만 이들은 샘플의 흐름에 관해선 비전이 없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데이터가 없다는 뜻이다. 리드는 리제네런이 펜실베이니아의 가이신저 Geisinger 병원(‘펜실베이니아 사례’ 기사를 참조하라)과 협력 관계를 맺을 무렵 회사에 들어왔다. 가이신저 병원은 종합적 의료기록을 보유한 환자 10만 명의 동의를 얻어 유전자를 수집하고 염기서열 분석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RGC를 이끄는 에어리스 배라스 Aris Baras는 “가이신저는 이 데이터를 사용해 치료를 실질적으로 개선하길 원했다”고 말했다.

이후 리제네런은 50만 명 이상의 데이터를 확보한 영국 바이오은행(UK Biobank)등 60개 이상의 데이터 보유 기관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배라스와 리드는 “데이터의 규모와 다양성이 커지면, 자체적으로 새로운 발견을 할 능력도 그만큼 커진다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이 작업에서 출발한 표적 생물학 연구만 50개에 이르고 있다.

▲히든 피겨스: 의료기록의 숨은 가치

듀크대 교수 출신의 종양학자 에이미 애버너시 Amy Abernethy에 따르면, 의료 데이터를 단순히 모아놓는 건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질과 맥락(quality and context)’이라는 최소 두 가지 기준을 만족할 때, 데이터는 비로소 유용해진다. “의료 행위의 핵심적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실제 현장이 얼마나 무질서한지도 알 수 없다.” 애버너시는 4년 전부터 구글 벤처스 Google Ventures(GV)가 지원하는 벤처기업 플래티런 헬스 Flatiron Health의 최고의료책임자도 맡고 있다.

플래티런의 주력 분야인 암치료 기록을 살펴보자. 종양학 EHR에서 가장 유용한 정보는 상당수(약 절반 가량)가 의사의 진료기록이다. 그런데 진료기록은 구체적인 항목으로 체계화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항목별로 깔끔하게 나누기 힘든 관찰 기록이기 때문이다.

테네시 종양센터의 CEO이자 의사인 제프리 패튼 Jeffrey Patton은 “과거에는 전자기록을 청구서 발행과 치료비 수납에 활용했다. 다시 말해 돈을 받기 위해 남겨야 하는 문서화 절차였다”고 말했다. 테네시 종양학 센터는 테네시 주에서 가장 많은 암 환자를 치료하는 지역기반 병원이자, 플래티런의 시스템을 이용하는 지역 암센터 수백 곳 중 하나다.

플래티런이 내세우는 장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다. 컴퓨터에만 의존할 때 놓치는 것을 사람이 잡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애버너시는 데이터를 모으는 것보단 “정리”하는 게 어렵다고 말했다. “맥락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이 단계가 매우 힘들어진다.”

현재 플래티런은 미국 암 환자 중 20%의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로슈 제약의 CEO 대니얼 오데이 Daniel O’Day는 “플래티런의 구조가 아주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로슈의 모기업 로슈 홀딩 AG Roche Holding AG는 지난 2월 플래티런을 19억 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오데이는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플래티런은 규제 수준에 맞는 현실적인 데이터를 생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기업과 차별화된다”고 밝혔다. 데이터를 정리하는 능력이 “이론적으론 (로슈가 개발 중인 면역요법 암치료제 테센트릭 Tecentriq의 한 임상시험에서) ‘통제’ 역할을 일부 대체할 수 있었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이다.

암 치료제 연구에서 임상시험 데이터의 축적은 수십 년간의 난제였다. 플래티런의 시스템은 특정 환자를 적합한 치료제 연구와 매칭하는 작업을 용이하게 하는 등 이 방면에 훨씬 광범위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실제로 IBM의 인지컴퓨팅 시스템 왓슨은 이미 이 분야에서 일정 정도의 성공을 거뒀다. 올 3월 미국의 대형 병원 메이요 클리닉 Mayo Clinic은 왓슨이 유방암 임상시험 등록률을 80% 높였다고 보고했다. 메이요의 크리스토퍼 로스 Christopher Ross 최고정보책임자(CIO)는 업계 전문매체 모바이헬스뉴스 MobiHealthNews와의 인터뷰에서 “왓슨 덕분에 임상시험과 환자간 매칭을 과거보다 훨씬 빠르고,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PBM 처럼 과거에는 환자와의 관계가 미미했던 조직들도 변하고 있다. PBM이 감독하는 엄청난 양의 의료 데이터에서 나온 발견이 사회 전반의 의료 수준과 비용을 모두 개선할 수 있게 됐다.

시그나가 지난 3월 인수를 확정한 PBM, 익스프레스 스크립츠 Express Scripts를 살펴보자. 미주리 주에 본사를 둔 이 기업은 매년 환자 1억 명에게 발행되는 진단서 14억 건을 처리하고 있다. 익스프레스는 환자가 처방된 약을 실제 복용했는지도 알고 있다. 미국에서 환자가 처방전을 따르지 않아 발생하는 비용은 추정치마다 다르지만 연 1,000억~3,000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이는 환자가 투약 지도를 어겨 발생한 합병증 관련 비용이다.

익스프레스의 수석데이터책임자(chief data officer) 톰 헨리 Tom Henry는 “데이터를 통해 환자의 처방전 준수 확률을 예측할 수 있는 요인 300가지를 파악했다”고 말했다. 인구학적 기본 정보(소득 수준, 거주지)부터 행동 관련 데이터(기억력, 미루는 성향 등 복약 지도를 어긴 환자를 대상으로 익스프레스가 한 조사에 근거한 정보) 외에도 처방 의사와 환자의 성별(여성 의사가 담당한 남성은 처방을 어길 확률이 높다)등 언뜻 상관 없어 보이는 요인까지 실로 다양하다. 익스프레스 측은 이 알고리즘이 검증을 마쳤으며 정확도가 94%라고 밝혔다. 이 알고리즘을 활용해 환자 별로 점수를 매기고 다양한 방식으로 복약률을 높이고 있다. 헨리는 이에 대해 “빅 브라더 같지 않은, 아주 조심스러운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익스프레스는 이 기술 덕분에 처방을 어기는 환자 비율이 37% 낮아졌고, 의료비용도 1억 8,000만 달러 이상 절감됐다고 밝혔다.

혁명이 늘 그렇듯, 파급 효과와 부작용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 행동부터 서두르는 이들이 많다. 빅데이터 의료혁명에서도 환자의 프라이버시부터 ’피할 수 없는 리스크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윤리적 딜레마까지 다양한 질문이 수반되고 있다. 디지털 의료 예찬론자들은 빅데이터가 우리가 꿈꾸던 “비장의 무기”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 무기가 과연 누구를 공격할지, 지금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번역 김화윤 whayoon.kim@gmail.com

▲펜실베이니아 사례: 의료데이터 혁명의 미래를 보고 싶다면? 펜실베이니아 시골로 가보라.

몇 년 전, 펜실베이니아에 위치한 가이신저 병원 경영진은 의사들이 늦은 시간까지 전자건강기록 시스템에 접속한다는 걸 발견했다. 낮에 처리하지 못한 행정 업무 때문이었다. 가이신저의 데이비드 파인버그 David Feinberg CEO는 미국 의료계에 번아웃 증후군이 만연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데이터를 검토한 후, 65세 이상 환자의 진료 시간을 두 배로 늘린다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가이신저의 의사들은 이제 고령 환자를 40분간 진료한다. 그 결과 하루에 보는 환자 수가 크게 줄었다. 이는 재정적으로 상당히 불리한 결정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후 데이터를 분석해 보니 재정에는 타격이 없었음이 밝혀졌다. 세심한 진찰을 받게 된 고령 환자가 내원 시 말하지 않았던 증상으로 응급실에 오거나, 입원할 확률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데이터가 현대의 석유라면, 펜실베이니아 농촌 지역에서 환자 300만 명을 진료하는 가이신저는 의료계의 사우디아라비아다. 1915년 설립된 가이신저는 환자 치료와 보험을 모두 제공하는 통합형 병원이다(덕분에 양쪽 모두의 데이터를 갖고 있다). 1996년 HER을 전면 도입했는데, 미국 대형병원 중 가장 빠른 편에 속했다. 이후 EHR에 꾸준히 투자해 현재는 환자가 아이폰으로 자신의 진료기록을 열람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진료와 보험 청구 내역이 검색 가능한 형태로 한데 모이자, 구글 검색처럼 쉽게 실시간으로 찾아보는 것도 가능해졌다. 의사의 진료기록이나 의료 영상 등 구조화되지 않은 자료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몇 년간 가이신저는 이를 활용해 수술실 이용을 합리화했다(과거에는 수술이 길어질 것 같아도 무조건 45분 단위로 수술 일정을 배정했다). 또, 병원 체계 내 어떤 변수가 비용을 유발하는지 찾아내고(소모품을 남들보다 많이 쓰는 수술의 등), 의료영상을 집중 검토했다. AI로 훈련된 컴퓨터를 활용해 뇌졸중 가능성이 높은 환자를 찾아내는 식이었다.

파인버그 CEO는 빅데이터가 의사와 간호사의 역량을 개선하지는 않는다고 보고 있다. 환자 진료와 간호를 개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스마트한 의약품 설계: 대형 제약사의 ’실패 문제‘를 극복할 방법은? AI가 답이라고 믿는 회사가 매사추세츠 주 프레이밍엄 Framingham에 있다.

제약사 CEO들은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혁신적 의약품을 개발할 땐 투자 수익률이 충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현재 이 수익률이 부진하다. 2017년 딜로이트가 제약업계 상위 12개사를 분석한 결과, 2010년만 해도 10.1%였던 신약 연구의 수익률이 3.2%에 불과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실패 확률이 가장 큰) 최초 단계에서 AI를 활용해 신약 개발을 개선하는 것도 한 가지 답일 것이다. 딜로이트는 ’(AI가) 임상시험과 건강 기록, 유전적 특성, 전임상 연구 등에서 얻은 다량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 AI는 데이터 내 패턴과 트렌드를 분석해 연구자 혼자 조사할 때보다 훨씬 빠르게 가설을 세울 수 있다‘고 밝혔다.

머크 Merck, 사노피 Sanofi, 아스트라제네카 AstraZeneca 등 대형 제약사들은 이미 연구에 빅데이터를 도입했다. 2017년 아스트라제네카는 매사추세츠 주 벤처기업 BERG와 협력 계약을 체결했다. 치료 가능성이 높은 생물학적 표적을 찾고, 파킨슨병 등 신경학적 질환에 맞설 기질(agent)을 찾기 위해 BERG의 AI 플랫폼을 선택한 것이었다.

어떤 방식일까? BERG의 니븐 R. 내레인 Niven R. Narain CEO는 이를 “생물학으로의 귀환”이라 설명했다. 건강한 사람과 환자에게서 얻은 조직 샘플을 여러 분자 수준에서 분석하고, 임상 데이터와 결합시켜 BERG의 AI 플랫폼에 입력해 표적을 찾아내는 것이다.

BERG는 데이터 분석을 할 때 ‘일반에 공개된 데이터베이스’는 지양한다. 내레인은 “우리는 신경망보다는 베이즈 추론Bayesian approach /*역주: 기존 데이터를 기반으로 원하는 값을 추출하는 확률론의 일종/을 활용한다”고 말했다. “데이터를 대량 확보해 모델에 넣고 연관 관계를 찾는 게 아니다. 우리는 미리 가설을 정해 놓고 시작하기보단, 시스템에 모든 데이터를 넣고 데이터가 가설을 만들게 한다.”

일단 뛰어들고 본다는 점에선 AI도 전통적 과학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참 희한한 일이다.

▲데이터는 누구의 소유일까?: 나를 나로 만드는 게 DNA라면, DNA는 나만의 것일까?

미 연방무역위원회(FTC)가 지난해 휴일에 깜짝 공지 하나를 올렸다. 가정용 DNA 테스트 구매를 희망하는 소비자는 프라이버시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FTC는 ‘대부분의 테스트는 피부 표면을 한 번 닦아내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샘플에서 각 개인을 고유의 존재로 만드는 생물학적 구성을 파악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개인의 가장 사적인 정보를 통해, 제3자가 이득을 취할지도 모른다는 경고였다.

유전체 해독 전문업체 23앤드미 23andMe는 고객 500만 명의 DNA를 보유하고 있다. 회사는 제넨테크 Genentech, 오츠카 Otsuka 등 제약업체 및 연구기관들과도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앤 보이치키 Anne Wojcicki CEO 겸 공동창업자는 “협력 관계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고객 데이터에서 개인 식별정보는 삭제됐으며, 본인 동의가 있어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이치키는 “고객들이 자신의 데이터에 대한 소유권이 있고, 유전적 원인으로 인한 건강상 위험이 있다면 필요한 만큼 알 권리도 있다”고 강조했다. 종교적 신념처럼 굳건한 말투였다. 사실, DNA 정보에 대해 제공자 본인이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놀랍게도) 극단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디지털 의료의 선구자인 심혈관 전문의 에릭 토폴 Eric Topol 같은 이들은 DNA 프라이버시를 적극 지지한다. “개인이 자신의 의료 데이터를 통제해야 하고, 그럴 권리가 있다고 확신한다.” 토폴은 스크립스 중개과학연구소장도 맡고 있다. “자기 몸일 뿐만 아니라 그 정보로 인한 변화가 생사를 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폴은 유전자 데이터의 가치가 크다 보니 취약한 측면도 있다고 보고 있다. “DNA 정보는 개인식별 정보가 사라진 상태에서도 왕왕 해킹이 되고, 여기저기서 도난 당하고, 비밀리에 판매되는 게 현실이다.”

실제 일부 기업들은 다량의 데이터 출처를 통해 개인 소비자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홍보하고 있다. 미국 최대 데이터 중개업체 중 하나인 액시옴 Acxiom(본사 아칸소 주)은 소비자 정보(소득 수준, 구매 습관)를 의료 및 보험금 청구 기록과 매칭할 수 있다고 자랑한다. 개인 식별정보는 삭제됐지만, 그래도 데이터가 좀 더 종합적인 형태를 띠면 의료보건 기업의 고객관리, 보험, 마케팅 개선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액시옴의 데이터윤리부문 총괄 실라 콜더슈어 Sheila Colclasure는 프라이버시의 시대가 끝났고, “윤리적 데이터 이용”의 시대가 왔다고 말한다. 유용한 발견을 위해 개인 데이터의 수집과 분석이 이뤄질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비자들에겐 의문이 남는다. 그렇게 창출된 가치는 누구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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