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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브랜드 이야기 (22)] 오리스, 115년 이어온 ‘마이웨이’ 전략

  • 기사입력 2019.03.27 13:43
  • 기자명 김타영 기자

<이 콘텐츠는 FORTUNE KOREA 2019년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너 자신의 길을 가라(Go your own way).’ 오리스가 지난해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은 올해로 창업 115주년을 맞은 오리스 역사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문구이기도 하다.◀

1929년 홀스테인 오리스 매뉴팩처 전경(왼쪽)과 현재 모습. 과거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사진=미림시계
1929년 홀스테인 오리스 매뉴팩처 전경(왼쪽)과 현재 모습. 과거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사진=오리스

[Fortune Korea] 1904년 6월 1일 스위스 홀스테인 시장실은 두 사업가의 젊은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스위스 시계 산업의 성지라 불리는 뇌샤텔, 그중에서도 라쇼드퐁과 함께 뇌샤텔 성지 투톱으로 꼽히는 르로클 출신의 폴 카틴 Paul Cattin과 조르주 크리스티앙 Georges Christian이 홀스테인 시장 설득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폴 카틴과 조르주 크리스티앙은 이 지역에서 얼마 전 폐업한 Lohner & Co 시계제조 공장을 인수하길 원했다. 시장은 고민에 빠졌다. 규모의 경제를 갖춘 큰 브랜드가 인수해준다면 지역경제 활성화에 적잖은 도움이 될 터였지만, 이 둘은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할 것이라 했다. 전자에 비해 리스크가 너무 컸다.

라쇼드퐁과 르로클이 아닌 ‘홀스테인’ 배경의 브랜드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도 영속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Lohner & Co처럼 폐업 전철을 밟진 않을까? 하지만 더는 시간이 없었다. Lohner & Co 폐업으로 작은 도시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시장은 복잡한 마음으로 서명란에 손을 옮겼다. 그래, 딴엔 르로클 출신들이니 서플라이 체인 네트워크 정도는 기대할 수 있겠지.

◆ 홀스테인을 바꾸다

Lohner & Co 시계제조 공장을 인수한 폴 카틴과 조르주 크리스티앙은 같은 해 오리스 브랜드를 론칭했다. Oris라는 이름은 홀스테인 북쪽을 흐르는 아름다운 개울 Orisbach에서 유래했다. 홀스테인을 배경으로 한 브랜드임을 당당히 드러내 차별화를 꾀한 것이었다. 이는 (현재도 그렇지만) 과거 대부분 시계 브랜드들이 어떻게든 시계 제조 메카인 뇌샤텔이나 시계 유통의 성지인 제네바와의 연관성을 강조하고자 노력했던 것과 대조되는 행보였다.

홀스테인 시장의 염려와는 반대로 오리스는 시계시장에 빠르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사업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창업 2년 만인 1906년 홀더방크에 서브 매뉴팩처를 지은 것을 시작으로 1908년 코모, 1916년 꾸흐쥬네, 1925년 허베츠빌, 지펜, 1936년 비엘/비엔느 공장을 차례로 세우면서 홀스테인 지역 주변을 새로운 시계산업 지대로 재탄생시켰다. 한적한 농가를 떠올리게 하던 오리스 매뉴팩처 주변부가 1910년대에는 300여 명에 이르는 오리스 직원들을 위한 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서며 홀스테인의 소도심으로 거듭났다.

◆ 시계 제조 규정 난관

시계 제작에 필요한 거의 모든 공정라인을 갖추면서 오리스는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1928년 2기 경영진이 들어서면서 오리스는 연속 공정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여러 실험적인 도전에 나서며 시계 업계의 관심을 끌었다. 규모는 물론 연구개발 분야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1934년 스위스 정부가 ‘시계 제조 규정’을 발표하면서 오리스의 야심 찬 도전은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시계 제조 규정은 스위스 시계 산업을 보호하겠다는 의도로 만들어졌지만, 시계 업체들의 새로운 기술 도입을 방해하는 장애물로도 기능했다.

시계 제조 규정이 오리스에 특히 뼈아팠던 부분은 당시 오리스 무브먼트가 핀 레버 탈진기를 기반으로 했던 까닭에 다른 기술인 레버 탈진기 기술 사용이 금지됐다는 점이었다. 핀 레버 탈진기는 밸런스 휠과 이스케이프먼트 휠 연결이 레버 탈진기보다 심플했다. 이 때문에 핀 레버 탈진기의 정밀도가 레버 탈진기보다 더 낮다는 주장이 제기돼 레버 탈진기 기술 사용이 금지된 오리스를 당혹게 했다.

◆ 집요한 투쟁과 성공

당시 오리스는 고객 경험을 통해 정밀성을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 도입을 방해한 시계 제조 규정이 주는 피해가 아주 크지는 않았다. 오히려 오리스는 시계 중요 부품인 탈진기를 1938년부터 자체생산하는 등 매뉴팩처 발전을 거듭해 나갔다. 1938년은 또 오리스 스테디셀러인 빅 크라운 시리즈를 론칭하고 오리스 아이코닉 디자인인 포인터 데이트를 선보이는 등 여러모로 기념비적인 해이기도 했다.

오리스는 집요한 면이 있었다. 1934년부터 계속된 자신의 핀 레버 탈진기 정밀도를 증명하려는 오리스의 노력은 1945년 르로클 스위스 시계 공식 등급 지정 센터(Bureau Officiel de Controle de la Marche des Montres) 검증으로 빛을 봤다. 이 검증에서 오리스 핀 레버 탈진기는 200여 항목에 이르는 정밀 검사를 통해 1등급을 부여받았다. 오리스형 핀 레버 탈진기가 정밀성 측면에서 결코 레버 탈진기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1956년, 오리스는 마침내 시계 제조 규정의 레버 탈진기 사용에 관한 부당 제재를 파기하는 데 성공했다. 1946년 캠페인을 주도하기 시작한 지 10년 만이었다. 오리스의 노력 덕분에 시계 제조 규정은 1966년 완전 철폐되기에 이르렀다. 제재 철폐로 오리스도 무브먼트에 레버 탈진기 기술을 적용할 수 있게 되는 등 성장 여력이 한층 더 커졌다.

2018년 Big Crown Pointer Date 출시 80주년을 맞아 출시한 Big Crown Pointer Date 80th 시계. 오리스 스테디셀러인 Big Crown Pointer Date는 이름과 같이 커다란 크라운과 Y자 모양 날짜 핸즈가 특징이다. 사진=오리스
2018년 Big Crown Pointer Date 출시 80주년을 맞아 출시한 Big Crown Pointer Date 80th 시계. 오리스 스테디셀러인 Big Crown Pointer Date는 이름과 같이 커다란 크라운과 Y자 모양 날짜 핸즈가 특징이다. 사진=오리스

◆ 전성기, 그리고 위기

1960년대 후반 오리스는 최고 전성기를 맞았다. 시계 제조 규정 철폐 2년 만인 1968년 당시 가장 우수한 레버 탈진기를 사용한 652 무브먼트로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는가 하면, 세계 10대 시계 제조회사에 이름을 올리는 등 여러 면에서 낭보가 이어졌다. 당시 오리스가 1년에 생산한 시계 수는 120만 개에 이르렀으며 고용된 직원 수는 900여 명에 달했다.

오리스 전성기는 1969년 상업용 쿼츠시계의 등장과 함께 막을 내렸다. 1970년 오리스는 스위스 거대 시계그룹 ASUAG(Allgemeine Schweizerische Uhrenindustrie AG·스위스시계산업연합)에 편입되면서 독립회사의 지위를 잠시 내려놓았다. 스위스 시계 업계에 불어닥친 쿼츠 충격을 연합체 합류로 조금이나마 줄여보려는 시도였다.

쿼츠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스위스 시계 업체들은 각자도생이 어려워지자 연합체를 이뤄 대응했지만, 1970년대 후반 들어선 이 연합체마저도 목숨이 경각에 달릴 정도로 위기가 극에 달했다. 1980년대 초 연합체마저 존속이 어려울 정도로 상황이 악화하자 당시 스위스 시계업체 양대 연합체였던 ASUAG와 SSIH(Societe Suisse pour l’Industrie Horlogere·스위스시계제조업계협회) 간 합병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 새로운 활로 모색

이 시기 오리스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연합체 간 합병 이후 브랜드 간 매뉴팩처 구조조정과 합종연횡으로 ‘오리스 스타일’이 희석되는 상황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오리스는 1982년 경영권 회복 후 ASUAG로부터 독립하며 ‘모험에 가까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시작했다.

오리스는 독립과 함께 ASUAG 합류 후 만들기 시작했던 쿼츠시계를 더는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쿼츠시계가 시계 업계 대세가 된 상황에서 오리스는 1904년 브랜드 창립 때와 같은 차별화 승부수를 띄운 것이었다. 1983년, ASUAG와 SSIH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으로 탄생한 스와치그룹은 ‘전략적으로 쿼츠시계에 접근하겠다’는 계획을 밝혀 오리스와 구별되는 모습을 보였다.

오리스는 다시 기계식 시계장인들을 끌어모아 빠르게 공정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1984년 새로운 비전을 천명했다. 합리적인 가격과 특별한 무브먼트로 기계식시계의 세계적인 선구자가 되겠다는 청사진이었다. 이 시기 오리스는 과거 영광을 이끌었던 빅 크라운 시리즈의 재정비와 포인트 데이트의 재도입으로 다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 자신의 길 추구

이후 다시 기계식시계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오리스도 차차 사세를 회복, 1990년대부터 다시 성장궤도에 올랐다. 오리스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기계식시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애정을 놓지 않은 역사를 기념하고자 1990년 ‘고성능 기계식 시계’ 슬로건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2002년엔 오리스 특유의 레드로터를 상표 등록하면서 오리스의 브랜드 정체성을 확고히 정립했다.

창립 110주년이었던 2014년엔 1970년대 이후 명맥이 끊겼던 자사 무브먼트 론칭을 다시 시작하며 완전한 부활을 알렸다. 오리스는 이후 매년 새로운 무브먼트를 추가로 발표하며 현재 총 5종의 무브먼트를 선보였다. 2010년 새로 발표한 ‘진정한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시계’ 슬로건은 진정한 오리스로 거듭나겠다는 다짐이자 선언이었던 셈이다.

1970년 이후 독자 개발한 다섯 번째 무브먼트인 114 론칭을 알린 2018년, 오리스는 ‘너 자신의 길을 가라’는 의미심장한 슬로건 발표로 주목을 받았다. 오리스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문구였기 때문이다. 유행을 따르지 않는 브랜드 작명부터 부당한 시계 제조 규정에 맞선 투쟁과 그 투쟁의 지속으로 결국 규정 철폐를 이끌어낸 것, 쿼츠 위기 상황에서도 모험에 가까운 선택을 한 것, 시대의 흐름이었던 쿼츠시계를 거부한 것 등 오리스의 역사는 남들과는 다른 선택의 연속이었다. 자신만의 길을 추구했던 오리스가 앞으로는 어떤 길을 걸어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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