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구조위원회 COO 인터뷰] “새 시대의 원조, 낭비 없이 해야 하는 이유는…”

인터뷰 | 매들린 새들러 국제구조위원회 부총재 겸 최고운영책임자(COO) ‘연구와 증거'로 니즈-리소스 간극 메우는 IRC의 전략

2025-11-26     김다린 기자

구호 현장이 딜레마에 빠졌다. 인도적 지원이 필요한 인구가 3억 명에 달하는 최악의 위기 상황인데, 주요 선진국의 원조 자원은 쪼그라들었다. 국제구조위원회는 성과와 효율을 해답으로 제시했다.

김다린 기자 quill@fortunekorea.co.kr 사진 강태훈

매들린 새들러 IRC 부총재 겸 COO는 성과 중심의 원조를 강조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2022년 2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2023년 10월), 수단 내전(2023년 4월),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2023년 9월), 미얀마 내전 격화(2023년 10월), 레바논 남부–이스라엘 접경 교전(2023년 10월), 에티오피아 암하라 무력충돌(2023년 7~8월), 아이티 갱 폭력 전국 확산(2024년 3월), 콩고 동부 내전 격화(2025년 1월)….

‘지구촌(Global Village)’으로 커뮤니티를 구성하던 건 옛말이다. 최근 3년간 벌어진 굵직한 지정학적 위기만 나열해도 숱하게 많다. 이렇듯 세계는 분열하고, 쪼개지고 있다. 곳곳에서 총성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이 대가를 가장 크게 치르는 게 취약국의 취약계층이라는 점이다. 분쟁이 벌어지면, 이들의 일상이 무너진다. 학교와 병원, 식탁이 흔들린다. 이들의 생사를 가르는 건 ‘누가, 어떻게 돕느냐’다.

국제구조위원회(International Rescue Committee, IRC)는 이런 이들에게 가장 먼저 손을 뻗는 글로벌 인도주의 비정부기구다. 1933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제안으로 설립됐고, 전쟁·분쟁·재난·기후위기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의 생존, 회복, 재건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 40개 이상 국가와 미국 28개 도시에서 2만 명이 넘는 직원이 활동 중이다. 2022년 11월 아시아 최초로 한국 사무소가 문을 열었다. 한국은 미국·영국·독일·스웨덴에 이어 다섯 번째 후원 국가가 됐다.

포춘코리아는 지난 10월 국제구조위원회의 매들린 새들러 부총재 겸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만났다. 그는 국제구조위원회 한국사무소 설립 3주년을 맞아 방한했다. 전 세계 위기 현장에서 국제구조위원회가 추진하는 ‘원조의 새로운 시대(A New Era for Aid)’의 방향과 혁신 사례를 한국 사회와 공유하고, 책임 있는 파트너로서 한국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새들러 부총재의 이력은 꽤 이색적이다. 영국 외무부·환경식품농림부·지방정부부 특별자문을 지냈다. 포드자동차 대정부정책 디렉터를 거쳐 공공과 민간을 모두 경험했다. 2013년 국제구조위원회에 합류해 운영·전략 수석부사장과 비서실장을 거쳤고, 현재 부총재 겸 COO로 핵심 운영을 총괄하고 있다. ‘Impact at Scale(대규모 영향력)’ 전략을 앞세워 성과 중심의 인도주의를 설계하고 있다.

다만 국제구조위원회와 새들러 부총재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녹록지 않다. 수요는 불어나는데, 자원은 줄어들고 있다. 전 세계에서 전쟁·박해로 이동 중인 인구는 1억 2000만 명을 넘는다. 인도적 지원이 필요한 이들은 3억 명에 이른다. 동시에 주요 선진국의 공적 개발원조(ODA)는 쪼그라드는 추세다. 니즈(인도주의적 필요)와 리소스(지원할 수 있는 자원)의 간극이 갈수록 벌어지는 위기, 새들러 부총재는 어떤 해법을 갖고 있을까. 포춘코리아가 물어봤다.

국제구조위원회는 최근 ‘원조의 새로운 시대’를 강조하는 흥미로운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어떤 의미인지 독자들에게 설명 부탁드려요.

원조의 새로운 시대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현재 우리는 여러 층위에서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지정학은 이전보다 불안정하고 경제는 취약하죠. 이 충격은 취약국의 취약계층에 가장 크게 닿습니다. 우리는 불안정을 느끼지만, 그들은 불안정을 ‘살고’ 있습니다. 원조도 이에 맞춰 적응해야 하는데, 그래서 더 민첩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몇 가지 고민이 필요한데요.

어떤 고민이죠.

첫째, 어디에서 일할지를 아주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가장 취약한 환경, 가장 취약한 사람들. 즉 지리적 초점이죠. 둘째, 수요가 늘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현재 난민이나 강제이주 인구가 1억 20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인도적 지원이 필요한 사람은 3억 명에 이릅니다. 숫자는 계속 커지고 있고, 또 커질 겁니다. 반면 자원은 줄고 또 줄고 있습니다. 이 간극을 메워야 합니다.

새들러 부총재는 공공과 민간을 넘나드는 이색적인 커리어를 갖고 있다.[사진=국제구조위원회]

간극이 커 보입니다. 정말 메울 수 있나요.

‘매우 큰 효과’를 내는 프로그램을 대규모로 확장하면 가능합니다. 가령 예전에는 ‘한 생명을 살리는 데 얼마 드나’ 같은 질문 자체를 꺼렸습니다. 이제는 같은 비용으로 세 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간단한 해법 같지만, 쉽진 않아 보입니다.

원조가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근거, 즉 증거가 있으면 가능합니다.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 그 프로그램이 효과가 있다는 증거(evidence base)가 있는지, 그리고 그걸 규모 있게 확장할 수 있는지. 이 세 가지 영역이 아주 중요합니다. 국제구조위원회가 에어벨 임팩트 랩(Airbel Impact Lab)을 운영하고 있는 건 이런 맥락 때문입니다.


임팩트 랩은 국제구조위원회의 연구와 혁신을 주도하는 조직이다. 이름은 1930년대 나치 점령지에서 피난민을 구출하던 국제구조위원회의 창립 멤버 배리언 프라이가 운영한 비밀 안식처 ‘(Airbel)’에서 따왔다. 은 아이디어가 안전하게 실험되고 자라는 ‘안식처’를 지향한다. 인도적 위기 현장에는 개발 분야만큼의 ‘깊은 연구’가 부족했는데, 임팩트 랩이 이 공백을 메웠다. 국제구조위원회는 국제 원조 분야에서 3% 비중을 담당하는 기관이지만 연구 비중은 30%를 감당해 왔다.

목표는 명확하다. 빠르고 거친 환경에서도 ‘무엇이 실제로 작동하는지’ 증거를 쌓고, 그 결과에 따라 과감히 전환하거나 중단하는 일이다.

영양실조 대응은 대표적 사례다. 국제구조위원회는 치료용 영양식 공급 체계를 고쳐 업계 평균 대비 비용을 30% 낮췄다. 목표는 40~50%까지 추가 절감이다. 말리에선 7만 명의 아동을 대상으로 시스템을 검증해 ‘근거’를 확보했다. 새들러 부총재는 “수치가 맞느냐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어떻게 했는지 보여줄 연구가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 동료 기관들과 비용 구조를 ‘오픈북’으로 공유하는 시스템도 운영한다. 혁신과 개선이 국제구조위원회 내부에만 갇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국제구조위원회의 전략은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이들을 ‘클라이언트(client)’’로 보는 데서 출발한다. 그들의 목소리로 필요를 확인하고, 그에 맞춰 연구와 증거, 비용을 설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간 기업이 고객을 대하듯, 더 많은 이들에게 실제 변화를 전달하려면 효율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있다.

국제구조위원회의 이런 전략은 시의적절하다. 각국 정부의 원조가 줄어드는 시점, 민간의 역할이 중요해졌는데, 기업이 사용하는 언어가 바로 ‘숫자’라서다. 새들러 부총재가 말했다. “임팩트를 숫자로 이야기하면 기업의 이해도 빠릅니다. 인도주의 기여는 ‘블랙홀’이라는 오해가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인식이죠. 우리는 그게 사실이 아님을 숫자로 입증해야 합니다.”

화이자재단(The Pfizer Foundation)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최근 몇 년, 재단은 세계백신면역연합(Gavi)과 손잡고 국제구조위원회의 REACH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목표는 분쟁을 피해 우회하지 않는 것이다. 분쟁 ‘안으로’ 들어가 접종 공백을 메우는 일이다. 그 결과 동아프리카의 접근 곤란 지역에서 미접종·저접종 아동 1900만 명 이상이 백신을 맞았다. 에티오피아 티그라이(Tigray) 같은 최접근 곤란 지역까지 확장되면서, 지역 맞춤형 접근의 위력이 입증됐다. Gavi 모델은 유엔의 조정력을 축으로 시민사회가 결집할 때 무엇이 가능한지 보여준다. 위기가 심화돼도 생명을 구하는 지원을 ‘대규모’로 실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GAVI의 지원으로 국제구조위원회가 주도하는 REACH 프로젝트는 동아프리카 전역에서 홍역·디프테리아 등 예방을 위해 900만 회 이상의 백신을 접종했다. [사진=국제구조위원회]

국제구조위원회는 교육에서도 같은 원리를 적용했다. 레고재단(The LEGO Foundation)과 함께 ‘플레이매터스(PlayMatters)’를 운영한다. 핵심은 놀이 기반 학습이다. 전쟁과 이주로 흔들린 동아프리카의 아이들이 인지·사회·정서·신체·창의 역량을 다시 세우도록 돕는다. 2025년 현재 전 세계 어린이 11명 중 1명이 인도적 지원을 필요로 한다. 분쟁 지역에 사는 어린이는 4억 7300만 명에 이른다. 이런 맥락에서 놀이와 교육은 단순한 수업이 아니다. 생명의 끈이다.

플레이매터스는 지금까지 난민과 수용 지역사회 아동 80만 명 이상을 지원했다. 올해 초에는 ‘Learning through Play in Emergencies’ 툴킷을 내놨다. 공교육 시스템이 무너지거나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도 놀이로 학습을 확산하기 위한 도구다. 연구 결과도 분명하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트라우마의 영향을 덜고 더 포용적이고 안전한 교실에서 배우며, 동기와 자신감, 감정조절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

이 모델은 동아프리카를 넘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중동으로 퍼지고 있다. 국제구조위원회와 레고재단이 강제 이주 경로에 놀이 공간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현장 맞춤, 증거 기반, 규모화. 국제구조위원회가 인도주의의 새 표준을 만들고 있다.


부총재님이 활약하는 배경엔 공공과 민간을 넘나들며 얻은 리더십이 자리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이색적인 커리어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리더십은 권위가 아니라 목적과 책임에서 시작합니다. 제도가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의 삶을 먼저 봐야 합니다. 공정함과 결과에 대한 책임, 결정에 영향을 받는 이들에 대한 책임이 기준입니다. 효과적인 리더는 공감과 실행을 묶고, 가치와 측정 가능한 성과를 함께 냅니다. 민간은 속도·효율·책임성이 핵심이고, 공공·인도주의는 신뢰·포용·장기 영향이 기준입니다. 두 세계를 연결해 규율과 인간미의 균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속 가능한 성과는 통제가 아니라 공유된 목표와 주인의식에서 나옵니다. 신뢰를 얻고 권한을 나눠야 합니다.

COO로서 가장 어려웠던 위기는 언제였습니까.

최근 미국 정부의 대규모 지원 삭감이 가장 큰 충격이었습니다. 며칠 만에 전 세계 현장이 흔들렸고, 어떤 프로그램은 유지하고 어떤 프로그램은 중단할지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모든 삭감은 곧 사람들의 삶에 닿습니다. 이 경험은 원조의 새로운 시대가 제시한 방향을 재확인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더 영리하고, 성과 중심적이며, 유연해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재정립하고 제한된 자원으로 최대 효과의 개입을 설계해야 합니다. 팀은 민첩하게 협력했고, 개인과 기업 파트너들이 힘을 보탰습니다. 연민과 연대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정학적 위기가 커지는 동시에, 원조의 영역도 격변하고 있네요.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한국은 새 인도주의 리더로 부상했습니다. 일부가 물러난 자리를 새로운 파트너가 메우는 흐름입니다. 한국의 서사는 분명합니다. 위기에서 회복, 회복에서 번영과 나눔으로 짧은 시간에 이동, 발전했습니다. 이 기억이 공감과 책임의 토대가 됩니다. 한국 문화는 세계를 비추고, 세계도 한국을 주목합니다. 혁신과 기술, 빠른 실행은 한국 경제의 DNA입니다. 국제구조위원회의 방식과 맞물립니다.

국제구조위원회가 한국에 사무실을 세운 지 3년이 지났습니다.

설립 3년 만에 정기후원자 4만 명을 모았습니다. 어떤 지역에선 “저기 일은 여기와 무관하다”는 안일함이 남아 있지만, 전쟁의 아픔이 짙게 남아 있는 한국은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그럼에도 한국에선 난민을 둘러싼 여론이 엇갈릴 때가 많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만난 난민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가장 인상적인 분들입니다. 용기 있고, 회복탄력적이고, 혁신적입니다. 최고의 동료가 될 자질을 지닌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불을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결의가 대단합니다. 개인과 기업과의 대화에서 이런 사례를 자주 나눕니다. 어떻게 버티는지 놀라울 때가 많지만, 해냅니다.

국제구조위원회는 숫자를 강조하지만, 사실 3억 명이 위기에 놓여 있단 사실은 절망적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국제구조위원회의 중심 기둥 중 하나는 낙관주의입니다. 인도주의자가 되려면 낙관이 필요합니다. 리더십의 본질은 선택입니다. 참여할지, 외면할지입니다. 낙관주의자는 참여를 택합니다. 아이들에게도 “나는 변화를 만들었다. 너도 할 수 있다”는 감각을 물려줘야 합니다. 그것이 더 큰 한국 경제를 만드는 일일 수도 있고, ‘돌려주는 일’을 함께하는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꼭 난민캠프로 가서 일하지 않아도 됩니다. 연결되면 됩니다. 한국이 세계와 촘촘히 연결되는 모습을 보며 희망을 봅니다. 새 사상가, 새 리더, 새 연결자, 새 낙관주의자들이 합류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