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춘US]믿고 맡길만한 기업

EQUAL TO THE TASK

2019-09-03     Dinah Eng 기자

레아 버스크 Leah Busque가 창업한 태스크래빗 TaskRabbit은 소소한 일과 심부름을 쉽게 아웃소싱해주는 일을 한다. 다음은 그녀가 만든 웹 플랫폼이 어떻게 기그 이코노미/*역주: 필요에 따라 기업들이 단기 계약직이나 임시직으로 인력을 충원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형태의 경제/의 출현으로 이어졌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Interview by Dinah Eng


내가 여덟 살 때 아버지에게 회사에서 가장 높은 직급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아버지가 CEO라 대답한 순간, 나는 장래희망을 정했다. 초등학교에서 재활용 사업을 시작했고, 집 지하실에 사무실을 차렸다. 그곳에선 내가 CEO였다. 
 
나는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과 수학을 전공했고, 부전공으로 무용을 선택했다. 2001년 버지니아 소재 스위트 브라이어 칼리지 Sweet Briar College 졸업 후엔 한 스타트업에서 일했는데, 그 기업은 곧 IBM에 인수됐다. 나는 이후 7년간 메신저 및 콜라보 제품 부문에서 일하며, 전 세계에서 매일 사용하는 소프트웨어 만드는 법을 배웠다.
 
공학자로서 나는 기술에 대한 열정이 컸다. 2008년 초엔 아직 애플 앱 스토어가 없었다. 나는 (당시 남편이었던) 케빈 Kevin과 보스턴에서 무게가 100파운드(약 45kg)나 나가는 골든 래브라도 리트리버를 키우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남편과 외식하러 나가려던 차에, 개 사료가 다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그 때 누군가 심부름 해 줄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순간 매장에 있을 사람 말이다. 나는 아이폰에 ‘내 심부름을 해줘’라는 의미의 런마이에런드닷컴 RunMyErrand.com 주소를 한 번 넣어봤다. 그런 서비스는 없었다. 하지만 그 도메인은 사용이 가능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도메인을 샀다. 
 
나는 부상하는 모바일 기술과 위치 기술을 소셜 네트워크(온라인 상에서 서로 연결된 사람들)와 결합하면, 잠재력이 엄청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소위 '서비스 네트워킹' 플랫폼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나는 잠재적 사용자들에게 “어떤 종류의 심부름을 위탁할 것이며, 얼마를 낼 용의가 있느냐?”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수리공이나 잡역부를 만나면, 서비스 가격으로 얼마를 청구할 것인지 물었다. 하루는 (당시) 시간제 차량공유 서비스 기업 집카 Zipcar의 CEO이자, 친구의 친구였던 스콧 그리피스 Scott Griffith를 만났다. 이후 그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났다. 그리고 그가  “이 프로그램 코드를 직접 만들어 보는 것은 어때? 왜 아직도 IBM를 다녀?”라고 물어보기 전까지, 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레아 버스크는 2017년 비공개 금액으로 태스크래빗을 이케아에 매각했다.  사진=포춘US

내 IBM 연금 펀드엔 약 2만 7,000달러가 있었다. 마침내 2008년 4월 연금을 깨고 직장을 나왔다. 이후 10주 간 집에서 칩거하며, 베타 플랫폼을 만들었다. 마지막엔 스콧의 사무실에서 1년 동안 무급으로 일하며, 혼자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 해 여름, 나는 보스턴의 찰스타운 Charlestown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내가 자주 가던 카페는 찰스타운 어머니협회 회원들이 자녀를 등교시키고, 매일 아침 들르던 곳이었다. 이 사람들에게 내 아이디어를 설명해줬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 나는 광고 웹사이트 크레이그리스트 Craiglist에 태스커 Tasker/*역주: 온라인을 통해 일자리를 찾는 사람/를 모집하는 광고를 냈다. 수백 장의 지원서가 들어왔다. 그 중 30명을 카페에서 인터뷰했고, 본점 태스커로 고용했다. 신원조사를 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적임자를 채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나의 기준은 과연 이 사람을 할머니 집에 불러 그녀의 심부름을 시켜도 괜찮은 지였다. 사업 시작 후 첫 3개월 간, 약 1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스콧은 내게 앤젤 투자를 받을 것을 적극 권장했지만, 2008년 9월경 주식시장이 붕괴했다. 처음엔 막막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때가 태스크래빗을 시작하기에 최적의 시기였던 것 같다.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벌 방법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그 이코노미는 2008년 경기 불황기에 탄생했다.
 
나는 결국 보스턴 지역 2명의 앤젤 투자자들로부터 15만 달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기업가들을 대상으로, 팰로앨토에서 12주 간 진행되는 인큐베이터 집중 훈련캠프인 페이스북펀드fbFund에 초청받았다.
 
나는 한 주는 보스턴에서 프로그램 작업을 했고, 그 다음 주엔 팰로앨토 캠프에 참가했다. 캘리포니아(West Coast)에서 사람들은 신규 창업자의 위험을 좀 더 적극적으로 감수하는 편이었다. 신용카드 한도가 거의 다 찼기 때문에, 뭔가를 살 때마다 신중해야 했다. 한 주는 보스턴에 막 돌아왔는데, '나는 일주일에 4시간만 일한다(The 4-Hour Workweek)'의 저자 팀 페리스 Tim Ferriss가 다음 주에 팰로앨토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와 단 15분의 만남을 위해 팰로앨토로 다시 돌아가는 비행기 값만 약 700달러였다. 나는 "미팅을 통해 그를 기업 자문이나 투자자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페리스는 나를 벤처캐피털 기업 플러드게이트 Floodgate의 공동 창업파트너인 앤 미우라-고 Ann Miura-Ko에게 소개해줬다. 미우라-고는 태스크래빗을 위한 시드 라운드/*역주: 초기 창업을 위한 자금조달 단계/를 주도했고, 총 180만 달러를 조달했다. 이처럼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모험정신이 회사의 궤도를 바꿔놓았다.    

2009년 말 나는 새로운 기업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아이디어 회의를 열어 후보를 다섯 개로 추렸다. 나는 런마이에런드라는 이름이 싫었다. 그러나 설문조사 결과 보스턴 사용자들은 모두 그 이름을 좋아했고, 아무도 명칭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좋은 반응을 받은 이름이 태스크래빗이었다. 
 
사업 초기에 배워야 했던 것 중 하나는 팀을 꾸리는 방법이었다. 나는 IBM에서 누군가를 채용한 적도, 해고한 적도, 관리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때로는 너무 성급하게 혹은 불필요한 인력을 채용하기도 했다. 나는 적은 비용으로 인재를 채용하는 방법을 고민하느라 밤잠을 설쳤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처음에 내가 놀랐던 부분 중 하나는, 문제가 생겼을 때 세 명의 사람들을 찾아간다면 3가지 서로 다른 조언을 듣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하는 사업에 대한 최종 결정자는 내 자신임을 자각하게 됐다. 정보는 수집하되, 내 직감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렸다. 경기를 하면서, 자신만의 전술을 정립해야 하는 것이다.
 
2015년 말, 이케아가 매장 내부 설치와 관련해 우리 회사의 도움을 받길 원했다. 나는 매장 내 파트너십을 체결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 달 후, 이케아가 인수합병에 관심을 보였는데, 그 즈음엔 우리는 플랫폼을 통해 한 달에 수백만 달러 규모의 거래를 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2017년 10월 이케아에 기업을 매각했다. 나는 벤처 캐피털 쪽으로 가기로 결정했고, 무한책임 파트너로 퓨얼 캐피털 Fuel Capital에 합류했다.
 
마치 첫 자식을 대학에 보낸 느낌이다. 늘 그런 심정일 것이다. 이제 태스크래빗은 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성공적인 기업이자 브랜드가 됐다. 창업자로서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이다.

◆최고의 조언(레아 버스크, 39세, 태스크래빗 창업자)
창업자의 건강은 그 기업의 건강에 매우 중요하다. 태스크래빗의 마지막 펀딩 라운드는 자금 조달이 가장 어려웠던 단계였다. 나는 결국 스트레스성 대장염으로 병원 신세를 졌고, 결장이 터질 뻔 했다. 기업 매각과 관련한 마무리 작업은 병상에서 해야 했다. 창업자는 개인적인 운동, 잠, 식단, 그리고 기업에 필요한 것에 모두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한다.  

번역 강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