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스파크랩이 설립 10주년을 맞았다. 세 설립자가 투자하고 키운 기업은 270곳, 현재 기업 가치는 6조7000억원. 성장을 이끈 건 남다른 통찰력만큼 단단한 질문이다. 세 사람은 투자를 위한 인터뷰 말미에 묻는다. “이 일을 왜 하느냐”고.
이상한 주주들이 있다. 돈 벌 궁리가 아니라 창업하려는 진심을 묻는다. 이들이 생각하는 진심은 가볍지 않다. “10년간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도 하고 싶을 만큼” 절박해야 한다. 진심이 서면 돈은 따라온다고 믿는다. 2012년 한국에 처음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AC) 문화를 이식한 스파크랩의 세 설립자, 김호민, 김유진, 이한주 공동대표의 이야기다.
AC는 초기 스타트업에 종자돈을 투자하고 각종 인프라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는다. 벤처캐피탈(VC)과 함께 스타트업 생태계의 중추를 맡는다. 미국의 대표 AC인 와이콤비네이터(Y Combinator)는 에어비앤비, 코인베이스 같은 기업을 키워냈다. 하지만 1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는 생소했다. 스타트업이 사업 모델을 갖추고 VC 눈에 들기 전까지 국내 창업은 개인의 몫이었던 셈이다.
세 사람의 믿음은 통했다. AC 프로그램 1기 업체인 미미박스는 전 세계 4000여개 뷰티 브랜드가 입점한 전자상거래 플랫폼으로 커졌다. 이곳 하형석 대표는 2013년 스파크랩의 첫 데모데이(성과발표회)에서 “아름다워지기란 쉽지 않다”는 화두를 던졌다. 내게 맞는 브랜드를 찾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뜻이었다. 하 대표를 시작으로 270명의 창업자가 10년간 데모데이 무대에 섰다. 이들이 일군 기업의 가치는 현재 6조7000억원이다(스파크랩 집계).
스파크랩 덩치도 커졌다. 약 1550억원 규모 벤처펀드를 운용한다. 국내 AC 가운데선 수위를 다투는 규모다. 처음부터 글로벌 네트워크를 강점으로 내걸었던 만큼, 포트폴리오 기업의 국적도 다양하다. 270곳 중 68곳이 해외기업이다.
이런 성과를 모아 11월3일 10주년 행사를 연다. 3년 만에 여는 오프라인 데모데이와 함께다. 행사를 한 달여 앞두고 만난 세 대표는 들뜬 기색이었다. 김호민 대표는 “칼을 갈았다”고 말하며 눈을 반짝였다.
컴업 같은 큰 스타트업 행사와 시기가 비슷하다.
유진 비교하기는 뭐(웃음). (국내 업계에서) 스파크랩 데모데이 포맷을 많이 참고한다.
어떤 포맷을 말하나?
한주 첫 데모데이는 건조했다. 창업자가 발표하고 패널은 심사하고 끝이었다. 와이콤비네이터에서 이렇게 했다. 이렇게만 해도 미국에선 투자자 네트워킹이 잘 된다. 한국에선 프로그램이 없으면 이런 방식의 교류를 어색해하더라. 그래서 K팝스타 연출하듯이 바꿨다. 행사에 온 사람들이 사업 내용만 듣는 게 아니라 ‘스타트업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라는 걸 느끼도록 하고 싶었다.
유진 큰 변화는 누구나 행사에 올 수 있도록 공개한 점이다. 기존엔 초청받은 사람만 참석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해외 연사를 초청해서 사전 행사도 열고, 프로그램 곳곳에 음악도 삽입했다. 준비하는 3개월간 발표 연습도 집중적으로 시킨다.
한주 바깥에서 스파크랩을 비판할 때 ‘발표 연습을 왜 저렇게 시키느냐’라는 말을 한다. 보여주는 데 치중한다는 것이다. 말이 꼬이는 건 말주변 때문만이 아니다. 수백 번 반복하고도 말이 꼬이면 사업 모델이 잘못된 거다. 왜 사업을 하는지 명확하게 정리가 안 된 거다.
지난해 행사는 글로벌 진출을 주제로 대담했다. 김호민 대표가 “10년간 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각오가 돼 있는 창업자라야 살아남는다”고 한 말이 인상깊었다.
호민 꼭 10년은 아닌데(웃음). 상황이 풍족하면 본질을 잊는 경우가 많다. 왜 해외지사를 내는지, 낸다면 왜 이곳에 내는지. 예를 들어 한국 창업자들은 실리콘밸리를 선호하지만, 미국은 업종별로 중심지가 다르다. 막연히 ‘더 성장하겠지’라는 마음으로 가면 고생한다.
유진 반대로 투자 받은 돈을 이만큼 아꼈다고 자랑하는 창업자도 있다. 투자해서 돈 벌려고 했으면 은행에 예치했겠지. 주어진 돈으로 가능한 한 많이 시도해보는 기업이 무조건 이긴다. 그러니 한번 시도할 때 드는 비용을 줄이자는 것이다. 무조건 절약하고 안 쓰는 게 미덕은 아니다.
호민 포트폴리오 기업 중에서도 데모데이에 두 번 이상 나온 기업이 있다. 기업용 클라우드 모니터링 서비스를 운영하는 와탭랩스(5기)가 그렇다. 지난해 알토스와 KB인베스트먼트 등에서 큰 돈을 투자 받았다. 이곳 이동인 대표는 2기 때 메모 앱(‘메모지’)을 선보였는데 잘 안 됐다.
창업자들에겐 친정 같은 느낌인가보다.
호민 잘 된다고 전화오는 사람은 많지 않다(웃음). 보통 전화 오면 “잠깐 좀 만날 수 있느냐.”
유진 그러면 ‘아, 다음달 직원 월급이 없구나’ 직감한다.
호민 ‘돈이 떨어졌다’ ‘공동창업자와 싸웠다’는 식이다. 일단 응원해준다, 너만 겪는 일 아니라고.
요즘 전화가 더 많이 오겠다. 어떤 말을 해주나?
한주 지금 있는 돈으로 살아남는 게 첫 번째다. 내년 6월까지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돈을 벌든지, 지출을 줄이든지. (시장에서) 매물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돈이 없는 것이 아니다.
호민 넥슨도 처음에는 웹디자인 외주로 버텼다. 월급 주려고. 목표만 잊지 않으면 된다. 게임을 잘 만들려면 이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카카오, 넷마블도 처음엔 PC방 운영하며 버텼다.
한주 버티면서 다음 기회를 봐야 한다. 해외로 눈을 돌리면 어렵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중동은 지금 굉장히 뜨겁다. 기름가격이 높고, 대금은 달러로 결제한다. 장기적으로는 미국과 중국 간 패권 다툼을 봐야 한다. 지금까지는 중국의 통신장비 위에 미국의 소프트웨어(SW)가 돌아가는 구조였다. 그런데 이제는 함께 쓰기 어려워졌다. 제3국 입장에서는 다른 선택지를 찾아야 하는데, 한국이 그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지금 방위산업이 그렇지 않나? 흐름을 읽고 준비해야 한다.
한국이 SW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나?
한주 잘할 수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잘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났는데 기계를 못 만드는 나라가 잘 될 수 없다. SW를 못하는데 어떻게 인공지능을 잘할 수 있나? 젊은 창업자는 여기서 기회를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지난 9월 어도비에서 경쟁 스타트업 피그마를 200억 달러에 샀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큰 돈 주고 사가는 기업이 SW 기업이다.
호민 해외 투자자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한번은 미국의 펀드 매니저가 스파크랩 포트폴리오에 투자하고 싶으니 만나자고 이메일을 보내왔다. 왜 나를 만나자고 했을까 궁금했다. 물어보니 ‘기술과 문화를 함께 수출하는 나라는 미국에 이어 한국뿐’이라고 하더라. 그만큼 한국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시장이 됐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전단지를 돌려서라도 버텼으면 한다.
스파크랩의 역사도 궁금하다. 서로를 Bro로 부르던데.
한주 (설립)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나?
호민 그랬던 것 같다. 한주 대표하고는 대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다. 유진 대표는 PC방에서 스타크래프트 하면서 친해졌다. (공동 설립자인) 버나드 문도 PC방 멤버였다. 그게 90년대 후반이었다. 30년 인연이다.
같이 일할 생각은 언제 한 건가?
호민 버나드 문 대표가 다리를 놨다. 한주 대표와 둘이 만나서 한국의 와이콤비네이터를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그 다음 저와 유진 대표가 참여했다.
한주 각자 사업에서 나름 성공했을 때였다. 의미 있는 일을 찾다가 AC에 생각이 닿았다. 우리의 노하우와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면 한국 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까지 도울 수 있다고 봤다. 버나드 문과 얘기를 나눈 날 저녁 바로 호민 대표에게 연락해서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버나드 문은 유진 대표를 추천했다. 얼마 뒤 유진 대표를 서울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만났다.
유진 인터뷰인지도 모르고 갔다(웃음). 일요일 아침 8시였는데, 안그래도 카리스마 있는 한주 대표가 ‘한국의 초기 스타트업 생태계를 바꿔보고 싶다’고 하더라. 설레어서 연봉도 안 물어봤다.
호민 (유진 대표를) 말렸다. 당시에 게임 퍼블리싱 총괄이어서 연봉도 높았다. 그걸 포기하고 온다고 하더라. ‘야, 예전만큼 돈 못 준다’고 했지(웃음).
유진 스타트업처럼 시작했다. 스타트업을 도와주는 스타트업.
창업을 해봤기 때문에 더 까다롭게 심사하는 것 같다.
유진 tvN 드라마 ‘스타트업’(2020)을 자문할 때도 하나만 부탁했다. 스타트업이 쉽게 성공하는 것처럼 그림을 그리지 말아 달라. 고생한다는 걸 보여 달라.
호민 성공하면 당연히 금전적인 보상이 있다. 그러나 그건 위험 부담을 한 것에 대한 보상이다. 처음부터 돈 벌고 싶어서 시작하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어떤 창업자는 이렇게 묻는다. ‘제가 연봉이 2억원이었는데, 정말 오래 고민해서 시작했는데 1억원밖에 투자를 안해주시면 어떡하나.’ 이렇게 접근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인터뷰할 때 마지막에 꼭 ‘이걸 왜 하고 싶느냐’고 묻는다.
같은 질문을 본인들이 받는다면?
호민 재미있어서 한다. 회사를 만나서 같이 고민하고, 해결책을 내고,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재밌다. 그 재미가 다하기 전까지는 계속 할 것 같다.
유진 여러 회사를 거쳤는데, 이제 스파크랩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길다. 왜 이렇게 오래 있었을까 생각해보니, 항상 도전이 있었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목표가 있었다. 아직까지도 AC와 스타트업 생태계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 10년은 어떻게 그리고 있나?
호민 스타트업을 도우려면 우리도 커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모 같은 마음이다. 아이가 커서 학원비를 내야 한다는데 줄 돈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도 VC와 사모펀드 운용(PE) 자격을 땄다. 앞으로의 10년은 AC를 중심으로, 스타트업을 더 잘 도울 수 있는 펀드를 만드는 거다.
유진 더 많은 초기 스타트업을 돕고 싶다. 그래야 거기서 유니콘이 나온다. 수도권 외 지역이나 더 나아가서는 동남아시아, 중동 같은 지역에서도 초기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
/ 포춘코리아 문상덕 기자 mosadu@fortunekore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