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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춘US]미국의 흑인 두뇌유출
[포춘US]미국의 흑인 두뇌유출
  • BETH KOWITT 기자
  • 승인 2020.09.29 1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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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RICA’S BLACK BRAIN DRAIN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왜 해외로 나가면 돌아오지 않는 걸까. BY BETH KOWITT

2013년 당시, 거대 제약회사 머크의 임원이었던 나조 티타 리드 Najoh Tita-Reid는 면접을 보고 있었다. 합격하면 첫 국제업무를 맡아 해외로 파견되는 자리였다. 그녀는 “인터뷰 중간 쉬는 시간에 한 백인 신사가 나를 따로 불러냈다. 그리고 그 역할에 지원한 모든 백인 남성들이 ‘달을 정복할 수도 있다’고 PR하고 있다고 말해줬다"며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반면 그녀는 자신의 이력서에서 약점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설명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그녀에게 “그 자리를 원한다면, 가진 모든 것을 자산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인터뷰에 들어가 자신의 최대 장점을 제시했다. 그녀가 미국의 흑인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방 안에서 유일한 사람(흑인)이라는 사실에 익숙해져 있었다. 채용 매니저들이 찾고 있던 ‘문화적 역량’은 그녀가 일을 위해 배워야 했던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일상 생활에서 그저 살아남기 위해 익혀야 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나는 모든 문화의 뉘앙스를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라며 "생존하려면 변화해야 한다”고 자신을 홍보했다. 리드는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다"고 말한다.

티타 리드는 승진했고, 런던 이외의 서유럽 지역 경영을 맡았다. 7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해외에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 스위스에서 로지텍 Logitech의 글로벌 마케팅 업무를 맡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현재로서는 미국으로 돌아갈 계획이 없다.

미국 재계에서 승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많은 사람들처럼, 티타 리드는 그녀의 경력을 향상시킨다는 목표를 갖고 국제적인 커리어를 먼저 추구했다. 하지만 런던으로 처음 이주한 이후 몇 년이 지나, 그녀는 해외 체류를 선택한 흑인 국외 거주자들에 합류했다. 이들은 해외 근무의 직업적 혜택이 일반적인 경력 구축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내렸다. 티타 리드는 “유럽에서 일하는 것은 산소마스크를 착용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녀가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해줬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미국의 인종적 역학관계의 절망적인 무게를 매 순간 느끼지 않고, 주도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티타 리드와 그녀의 친구들은 이런 현상을 "제임스와 조세핀 효과"라고 부르는데, 이는 20세기 전반 미국의 인종 박해를 피해 도망쳐 유럽에서 성공한 흑인 제임스 볼드윈 James Baldwin과 조세핀 베이커 Josephine Baker를 기리는 표현이다. 그녀는 “그것은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유산의 일부처럼 느낀다"고 설명했다.

많은 흑인들이 올 봄과 여름, 해외에서 일하면서 거주하기로 한 결정에 큰 위안을 받았다. 경찰의 조지 플로이드 George Floyd 살해사건의 여파로, 고국에서 지속되는 국민적 운동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복합적이다. 왜 자신들이 복귀를 원하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확인을 하면서도, 운동에 앞장 서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있다.

해외에서 근무하는 이런 임원들은 (많은 사람들이 미국 재계에선 흑인들에게 일상적인 일이라고 묘사했던) 피로감을 겪었다고 말한다. 그 유형은 다음과 같다. ▲회사의 다양성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에 따른 피로감 ▲직장에서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느냐를 규정하는 불문율을 지켜야 하는 피로감 ▲당신이 그 역할을 맡을 자격이 있다는 점을 매일 증명해야 하는 피로감이다. 많은 흑인 주재원들은 해외 근무 당시에는 회사로부터 받는 압박을 뒤로 한 채, 동료들로부터 가치를 인정 받고 존경을 받는다는 점을 즉시 느꼈다고 말했다. 미국 내에선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다.

그 혜택은 사무실 밖으로까지 멀리 확장된다. 현재 해외에서 일하거나, 과거 일한 적이 있는 10여 명의 흑인들과 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주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그들의 해외근무 경험에서는 처음으로 인종이 그들을 판단하는 주요 프레임으로 기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8년간 헬스케어 임원으로 유럽에서 거주했던 숀드라 클레이 Shaundra Clay는 "당신은 그저 미국인이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그 어떤 짐도 짊어지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대신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힘을 행사하고 있다.” 그것은 그녀가 살면서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특권에 가까웠다. HSBC 뱅크 USA의 임원인 낸시 아만드 Nancy Armand는 미국에서는 성별과 인종을 항상 의식했다고 말한다. 반면 영국에서는 항상 국적을 먼저 의식했다. 아만드는 "과거에는 인종보다 국적을 먼저 의식한 적이 없었다”며 “그건 기분 좋은 변화”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일자리들은 고립을 초래할 수 있다. 티타 리드는 자신의 레벨에서 다른 흑인 여성을 보는 경우가 드물다. 그녀는 “하루하루 보면 거의 나 혼자"라고 말한다. KPMG의 글로벌 모빌리티 서비스 파트너 에이드리언 앤더슨 Adrian Anderson은 “이는 부분적으로 해외 거주자들의 세계가 다양성과 포용성 측면에서 대기업의 세계보다 20~30년 뒤처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회사에서 개인적인 경험과 직업적인 경험을 모두 갖고 있다. 앤더슨은 다국적 조직들이 직원들의 외국 업무를 관리하도록 도움을 주는 업계에서 25년 이상 근무했다. 그 자신 또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임원으로서 해외에서 거주했다.

모두가 탐내는 이런 해외 일자리는 대부분 역사적으로 흑인 직원들을 배제한 입소문 네트워크를 통해 결정된다. 아니면 임원실—오랫동안 흑인 인재들을 배제한 공간이었다—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인재 개발을 위해 내정돼 있다. 앤더슨은 “대부분의 글로벌 조직들은 임원진이 최고 수준의 역할로 승진하기 위해 국제적인 경험을 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설명한다. 이어 “해외 세계에 대한 접근의 어려움이 미국 재계에서 흑인 직원들의 최고 경영진 진입을 가로 막는 시스템적인 장벽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나조 티다 리드는 7년 전 해외 업무를 맡아 가족과 함께 뉴 저지에서 유럽으로 이주했다. 사진=포춘US
나조 티다 리드는 7년 전 해외 업무를 맡아 가족과 함께 뉴 저지에서 유럽으로 이주했다. 사진=포춘US

그러나 짐을 싸서 미국을 떠나는 흑인 임원들은 결코 유토피아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을 곧바로 지적한다. 티타 리드의 남편으로, 넴넷 마이너리티 리크루트먼트 Nemnet Minority Recruitment의 창업자 겸 CEO인 워런 리드는 "어디를 가든 흑인으로 인식된다는 점을 매우 잘 알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 회사는 교육기관과 협력하는 다양성 채용 및 컨설팅 업체다.

그는 이어 "불행히도 세계 대다수의 지역에서 나는 긍정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다. 그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나는 순진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런 의식에도 불구하고, 리드와 이번 기사를 위해 인터뷰한 사람들은 그들이 떠날 때까지 미국에서 흑인이라는 스트레스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부담을 줬는지 깨닫지 못했다고 말했다. 해외에서 편견에 직면했을 때에도, 그들은 자신들이나 자녀들의 삶이 미국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펼쳐질 것이라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현재 스위스에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출신의 디자이너 겸 사업주 이니 아치봉 Ini Archibong은 "미국의 ‘인종차별 브랜드’는 독특하다"라고 비유한다.

미국 재계에서, 흑인 경영자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보스라고 말해야 하는 관행에 익숙하다. 티타 리드는 “미국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회의실에서 당신보다 다섯 단계나 직급이 아래인 백인 영업사원이 악수를 하며 가방을 건넨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국으로 이적한 직후, 그녀는 자신을 즉각 책임자로 알아본 고객과 회의를 가졌다. 리드는 당시 그가 "당신은 흑인 여성이고, 여기에 왔으니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사실을 회상한다. 그녀는 "그 무엇이든 내가 최고 평가를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거의 울 뻔했다"라고 말한다. 리드는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양국의 차이를 압축한다. 미국에서는 항상 "어떻게 방에 들어왔고, 누가 당신을 들여보냈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영국에서는 “당신이 그 방에 들어갔다면, 당신은 거기에 있을 자격이 있다”는 가정이 적용된다.

그러나 해외 근무를 다녀온 많은 흑인 임원들은 “유럽에서 일하는 것은 보다 미묘한 형태의 인종 편견에 적응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종종 강력한 계급주의와 상통한다”고 말한다. 무디스에서 22년간 잔뼈가 굵은 알렌 아이작스 로우 Arlene Isaacs-Lowe는 2015년 영국으로 건너가 한 신용평가 업체를 위해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지역의 관계 관리를 총괄했다. 그녀는 새로운 영국 팀을 만난 날, 하워드 대학교의 동문이자 경영대학원의 이사회 멤버로 거듭 소개된 뒤 이 대학의 유명한 동문들이 반복적으로 언급된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것이 전통 흑인 대학의 진정한 가치를 확립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점을, 그리고 더 나아가 상류층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혈통’을 증명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이상하다고 느꼈다.

티타 리드는 2017년 글로벌 최고마케팅책임자(CMO)로 건강식품 회사에 합류했고, 가족도 스위스로 이주했다. 그녀는 “새로운 고향에서는 민족주의가 지배했다”며 “스위스 사람들은 먼저 스위스 사람들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당신이 그런 문화 출신이 아니라면, 당신은 전혀 해당 사항이 없다.” 그녀는 스위스 전역에서 자신의 국적에 대해 편견을 가졌다고 느낀 한 독일 사업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티타 리드에게는 모두가 아웃사이더로 생각돼 다행이었다. 그녀는 "우리는 모두 공평하게 기회를 갖지 못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똑같이 배제된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그 사업가에게 그가 독일로 돌아가 다시 인정을 받은 것과 달리, 자신은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여전히 아웃사이더처럼 느껴졌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유럽에서 미국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미국에서 흑인만큼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3년 전 티타 리드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일자리 기회가 있었지만 거절했다. 그것은 단지 직업적인 결정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결정이었다. 그녀는 "미국에서 느꼈던 스트레스와 남편과 아들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다. 그것은 내가 이제까지 깨달은 그 무엇보다 더 무거운 무게였다”고 말한다.

나는 리드와 줌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햇빛이 잘 드는 날 새들이 지저귀는 취리히의 집 밖에 앉아 있었다. 그는 내게 임시 주택에 살던 런던에서 가족의 첫날 밤에 대해 들려줬다. 그는 늦은 밤 호텔과 아파트를 오가다가 두 명의 경찰관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갑작스럽게 움직이지 말고, 경찰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내 모습을 잘 보이도록 마음 속으로 다시 한번 확인을 했다. 경찰관들은 그저 저녁 인사를 하고 그를 지나쳐 갔다. 그는 "정신이 쏙 빠지는 경험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한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눈 후, 리드는 제임스 볼드윈의 말을 인용한 이메일을 보내왔다. "이 나라에서 흑인으로서 비교적 의식을 갖고 산다는 건 거의, 거의 항상 분노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해외에서 살면서, 리드는 그 분노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는 "그 분노는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나를 괴롭히거나 사로잡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디미트리 레저 DIMITRI Léger에게, 해외에서 성공한 흑인의 이야기는 유효하다. 단, 유럽 회사에 입사하고 싶을 때만 한해서다. 그는 “만약 당신이 미국에 재산이 있다면, 큰 환영을 받는다. 하지만 일자리를 요구하면 사정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레저는 15년 전 해외로 이주했다. 당시 부인은 스웨덴 사람이었고, 그녀는 자신의 가족과 더 가깝게 살고 싶어했다. 레저는 항상 국제적인 직업에 대한 생각에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2004년 하버드 대학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따기 위해 언론계를 떠났고, 결국 이듬해에 제네바 세계경제포럼에서 파트너십 및 커뮤니케이션 매니저로 일했다(레저는 1999년부터 2002년까지 포춘에서 일했지만 우리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레저는 “10년 넘게 유엔에서 전임 일자리나, 다국적 기업에서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임원 자리를 얻기 위해 반복적으로 노력했다”고 말한다. 아이티계 미국인으로 영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구사하는 그는 유엔에서 수 차례 퇴짜를 맞았다고 덧붙였다. 결국 그 자리는 2개 국어—그 역할에는 필수 조건이다—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영국인들에게 돌아가게 됐다. 기업들에서는 인터뷰 기회는 많았지만, 그는 자신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면 분위기가 차갑게 바뀌곤 했다라고 말한다. 레저는 면접을 본 한 고용주가 “우리 투자자들은 흑인 대변인을 불편해 할 것”이라며 매우 노골적으로 그의 인종을 문제 삼았다. 결국 레저는 고통스러운 직접 경험을 피하기 위해, 이력서에 사진을 붙이는 유럽의 관행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자, 아예 인터뷰 기회를 갖지 못했다.

레저는 그가 고전하는 이유의 일부분을 공식적인 혹은 비공식적인 지원 시스템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내 흑인 최고 경영진의 수는 참담한 수준이지만, 레저는 유럽에서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는 "고위 흑인 임원은 어디에도 없다"며 "서로를 챙겨줄 네트워크도 없다"고 지적한다. 레저를 포함한 몇몇 흑인 남성들은 내게 종종 그들이 방문객으로 인식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어떻게 이 도시의 멋진 지역에 있는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을까?

이제 큰 아이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생각을 하고 있는 가운데, 레저는 뉴욕으로 돌아와
맨해튼 미드타운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6월 이야기를 나눴을 때, 그는 정기적으로 도시에서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 시위에 직면했고, 경찰차를 볼 때마다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매번 그것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집으로 돌아와 기뻤다. 그는 "언론계에서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를 찾을 가능성이 마음에 든다"며 "전염병 유행과 현재 진행 중인 인종 정의를 위한 투쟁 속에서도 유럽에서 나를 따돌린 일자리를 얻을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해외 근무의 주요 단점 중 하나는 귀국 후 겪는 어려움이다. 갑자기 임원들의 자리는 훨씬 더 줄었고, 업무 범위는 더 좁아졌다고 느껴진다. 클레이는 유럽에서 8년 근무를 한 이후 2016년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 경험을 수십 년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성공을 축하 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묘사했지만, 아무도 당신이 얼마나 많이 성장하고 변화했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흑인들에게 귀국은 또한 ‘그들만이 느끼는 독특한 짐’으로 다가왔다. 클레이는 미국에서 늘 보고 경험했던 인종차별이 이제는 다른 명료함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녀는 "당신이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수록, 그 차별은 더 아프고 충격적으로 다가온다"고 설명한다. "모든 짐은 다시 당신의 짐이 되고, 당신이 그걸 짊어질 힘을 잃었기 때문에 더 무겁게 느껴진다.” 그녀와 내가 인터뷰한 다른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경험하는 인종차별에 대해 오히려 덜 관대해졌다”고 말했다.

해외에 남아 있던 이들은 올 봄과 여름, 그들만의 새로운 개인적 투쟁에 직면했다. 그들은 경찰의 조지 플로이드 살해사건과 그에 따른 시위 이후 깊은 갈등의 감정을 토로하고 있다. 리드는 “해외에 있는 것이 가족들에게 안전하고 긍정적인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된 의무를 충족하고 있다”고 말한다. 리드의 자녀들은 그가 미국에서 흑인 아이로 자라며 겪어야 했던 문제들 중 일부와 씨름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것은 좋은 측면이었다”며 "다른 부정적인 측면은 지금 운동이 진행되고 있고, 내가 그것에서 배제돼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 수반되는 약간의 죄책감이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운동을 진전시키기 위해 내가 받은 교육과 자원, 네트워크를 최대한 동원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한다.

스위스에서 활동하는 미국 디자이너 아치봉은 지금 당장 미국으로 가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스위스도 나름대로 문제가 있지만, 그가 돌아가고 싶을 정도는 아니라고 설명한다. 내가 인터뷰한 수많은 흑인 임원들이 묘사한 그 끊임없는 ‘실존적 공포’에서 탈출하는 힘은 너무나 강력하다. 그는 "일단 그 두려움이 내게서 사라지자, 나는 결코 귀국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신체적 안전에 끊임없이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그의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일에 더욱 창의적으로 임할 수 있게 했다. 유럽으로 이주한 지 몇 년이 지난 후, 아치봉은 오랫동안 매일 착용하던 칼라 셔츠를 입는 것을 중단했다. 과거에는 과하게 차려 입는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 규칙을 지켰다.

아치봉은 “미적인 이유로 정장을 갖춰 입기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일종의 ‘갑옷’이 됐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미국에서 옷을 차려 입었을 때 더 안전하다고 느꼈고, 정장에 가까운 옷들은 다른 비 흑인 디자이너들이 무심코 입었을 때 받았던 것과 같은 직업적인 존경을 얻는데 도움을 줬다”고 설명한다. 그는 스위스에서는 더 이상 이런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이제 그는 기분이 내킬 때만 양복과 넥타이를 꺼낸다.

티타 리드는 현재 미국 내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는 느낌이 무엇인지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바다 건너 떨어져 있는 사실에 다소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녀가 귀국하고 싶은 생각을 가로 막았던 모든 우려들을 보는 것은 슬프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해외에 남기로 한 결정의 타당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그것은 또한 그녀가 미국에 남기고 온 모든 좋은 기억들을 뚜렷하게 인식하게 만들었다. 티타 리드는 "당신은 문화와 사람들, 친구, 그리고 가족을 포기하는 것"이라며 "거기에는 이처럼 대가가 따른다"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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