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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춘US]스카겐 공동설립자 샬럿 조스트 성공기
[포춘US]스카겐 공동설립자 샬럿 조스트 성공기
  • Dinah Eng 기자
  • 승인 2020.03.05 0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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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의 의지로 성공하다(SUCCESS THROUGH BEING PUSHY)"

그녀는 괴롭힘을 당했고, 영업직 사원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훗날 자신의 사업을 2억 달러 이상의 규모로 키워 낸 이 여성 기업가는 그런 괴롭힘에 당당히 맞섰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었다. 다음은 포춘 기자 디나 응Dinah Eng이 정리한 인터뷰 내용이다.

사람들이 샬럿 조스트 Charlotte Jorst에게 뭔가를 할 수 없다고 말하면, 그녀는 그 이상의 일을 해낸다. 미국에서 맥주를 팔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바로 그렇게 했다. 그녀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시계회사를 설립했다. 피부암으로 인해 승마를 중단해야 할 위기에 처하자, 그녀는 자외선 차단 승마복이라는 신제품들을 출시했다. 그녀가 어떻게 창업을 했고, 계속 경쟁해왔는지 소개한다.

나는 항상 사업을 하고 싶었다. 덴마크에서 자라면서 나는 부자가 되는 꿈을 꿨는데, 아마도 어린 소녀시절 학교에서 놀림과 괴롭힘을 당한 탓일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스키 리조트에서 일하기 위해 프랑스로 향했다. 당시 나는 키가 크고, 금발이고, 가슴이 큰 편이었다. 사람들은 내게 부적절하게 수작을 걸어왔다. 고졸 출신의 한계를 절감한 나는 학업에 집중하기 위해 덴마크로 돌아갔다. 나는 3년 반 만에 회계 및 경영학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재학 중에 칼스버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회사 맥주공장에서 남편 헨릭 Henrik을 만났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칼스버그를 알리는데 일조했다. 나도 1988년 학교를 마치자 그를 따라 뉴욕으로 갔다.

칼스버그는 앤호이저-부시와 협력하기 위해 몇 명의 덴마크인을 미국으로 보냈다. 하지만 내가 영업직에 지원했을 때, 회사는 여자들은 맥주를 팔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말테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덴마크를 떠났고, 앤호이저-부시는 나를 ‘미스 칼스버그’로 고용했다. 그들은 전국 축제에서 관심을 끌 수 있는 얼굴마담이 필요했다. 나는 초록색 띠를 두르고,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곤 했다.

당시에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직원들에게 시계를 주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래서 나는 미스 칼스버그 신분으로 전국을 도는 동안, 한 덴마크 시계회사의 홍보대사를 맡게 됐다. 이 회사는 기업 로고를 넣어 맞춤 제작할 수 있는 고급 시계를 판매했다. 앱솔루트 보드카 Absolut Vodka가 나의 첫 번째 고객이었다.

나는 전국 순회를 하지 않을 때, 뉴욕 거리를 걸으며 대기업들의 이름이 적힌 건물들을 고르고, 우리 시계를 팔 만한 마케팅 매니저들을 찾곤 했다. 때론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지만, 때론 그들이 나를 보고 제품 주문을 하기도 했다.

샌디에이고 아로요 델 마르 마구간에서 카스텔 덴마크 제품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샬럿 조스트. 사진=포춘US
샌디에이고 아로요 델 마르 마구간에서 카스텔 덴마크 제품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샬럿 조스트. 사진=포춘US

나는 구겐하임 박물관 시계를 제작하고 싶었다. 그래서 박물관 마케팅 매니저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결국 그는 나를 만나주기로 했지만, 내가 약속 장소에 들어서자 몹시 화를 냈다. 그리고 내 코 앞에 바짝 얼굴을 들이밀더니 “당신은 너무 불도저 같아!”라고 쏘아붙였다.

이틀 후 다시 전화를 걸자 그는 결국 내게 주문을 발주했다. 그는 휘트니 Whitney 미술관으로 옮긴 후에도, 계속 제품을 구입해줬다. 나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면서, 계속 사업을 밀어붙였다.

미스 칼스버그 일은 첫딸을 임신하면서 끝났다. 헨릭은 칼스버그에서 한동안 계속 일하다가 역시 그만뒀다. 당시 우리는 가진 돈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언제 멈춰설지 모르는 300달러짜리 중고차를 샀고, 건강보험도 없었다. 우리는 아기를 위해 침대를 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딸 아이는 침실 서랍에서 잤다. 우리는 끼니도 빵과 케첩으로 때웠다. 하지만 뭔가를 제대로 해보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시계 사업은 잘됐다. 그래서 나는 무역 박람회에 견본을 몇 개를 가져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실버스퀘어 Silver Square라는 작은 소매업체의 오너를 만났다. 그는 “시계들이 너무 아름다워 회사 로고를 떼내면 바로 팔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헨릭과 나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회사 이름을 스카겐 Skagen—덴마크에서 일조량이 가장 풍부한 어촌이다—에서 따왔다. 우리는 롱 아일랜드 주택을 담보로 1만 달러를 대출받았고, 자체 로고와 디자인이 들어간 시계 200개를 주문했다.

우리는 그 시계를 모두 팔아 시계 400개를 만들 비용을 마련했다. 그리고 400개를 판매한 자금을 다시 시계 800개를 만드는데 사용했다. 우리는 모든 돈을 재투자했다. 샤퍼 이미지 Sharper Image는 1992년 우리의 첫 대형 소매 고객사가 됐다. 그 해 연간 매출은 80만 달러였다.

네바다 주 세금이 더 낮았기 때문에 우리는 1993년 타호 Tahoe 호수로 이사했다. 거기서 둘째 딸을 가졌다. 여전히 우리 둘이 모든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저녁을 먹으려면, 시계상자들을 실은 트럭이 도착하곤 했다. 그러면 우리는 제품들을 내리기 위해 식사를 중단해야 했다.

처음에는 백화점이 우리 제품을 원하지 않아, 작은 지역 디자인 상점에 집중했고, 그 결과 컬트 브랜드가 됐다. 그러나 이후 노드스트롬, 니먼 마커스, 삭스, 메이시스 백화점이 고객사가 됐다. 패션업체 파슬 Fossil도 관심을 가졌다. 이 회사는 아예 스카겐을 인수하려고, 10년간 매해 우리에게 접근했다. 나는 2010년경에는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올림픽 마술(馬術) 부문에 출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회사 매각에 합의했다. 당시 스카겐은 파슬이 메이시스 백화점의 시계 매장에 입점시키지 못한 유일한 브랜드였다.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 1년 반이 걸렸다. 종업원들에게 회사 매각을 발표할 때, 우리 둘 다 울었다.

회사를 매각한 후, 나는 승마 훈련을 시작했다. 하지만 곧 피부암에 걸렸다. 의사들은 내게 실내에 머물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 승마를 할 수 있도록,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할 수 있는 물질 연구에 돌입했다. 나는 UV 보호 천으로 승마복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이 천은 덴마크의 학생복 같은 느낌이 났다. 나는 2012년 카스텔 덴마크 Kastel Denmark를 설립했고, 첫 해 매출 150만 달러를 올렸다.

나는 2016년 월드컵 결승에서 10위를 했다. 현재는 미국 올림픽 대표팀 도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 피부암이 한 번 재발했지만, 지금은 완치된 상태다. 나는 경마 행사에서 비공식 신제품 발표회를 열고, 승마용품점에 가서 우리 제품을 홍보한다. 나는 현재 스카겐 시절만큼 공격적으로 밀어붙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결코 판매영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일이 너무 재미있기 때문이다.

▲샬럿 조스트의 '최고의 조언'(스카겐 공동설립자 겸 카스텔 덴마크 창업자)

"사업 상대에 주의를 기울여라(Be careful whom you do business with)"

우리가 사업초기에 저지른 최대 실수 중 하나는 당시 파산을 선언한 소매업자에게 시계를 대량 판매한 일이다. 우리는 그의 신용을 확인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일로 당시 우리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약 6,000달러를 잃었다. 그 후 우리는 사람들의 신용을 확인하기 시작했고, (돈이 없어) 말 그대로 한동안 식사를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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