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포춘코리아 매거진 최신호를 무료로 읽어보세요.

본문영역

세상의 내부를 디자인하다

DESIGNING A WORLD INSIDE

  • 기사입력 2017.07.13 17:34
  • 최종수정 2018.09.03 17:19
  • 기자명 Dinah Eng 기자

이 기사는 포춘코리아 2017년 7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아서 겐슬러 Arthur Gensler가 창업한 세계 최대 건축 회사는 애플 스토어, 페이스북, 에어비앤비 같은 수 많은 고객사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담당해왔다. 달랑 직원 3명으로 시작한 이 회사는 사업 초기에는 여분의 문에 설계도 초안을 그리기도 했다고 한다.

아서 겐슬러가 52년 전 건축 회사를 설립했을 때, 그에겐 이렇다 할 사업 계획도 돈도 없었다. 그는 매주 금요일 밤마다 돈을 세곤 했다. 그가 책정한 자신의 최초 연봉은 고작 1만 4,400달러. 그렇게 시작했던 회사가 지금은 겐슬러 Gensler라 불리는 세계 최대 건축 회사로 성장했다. 겐슬러는 초창기 애플스토어, 페이스북, 에어비앤비 본사 인테리어 디자인을 담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상하이 타워 Shanghai Tower, 아부 다비 파이낸셜 센터 Abu Dhabi Financial Centre,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등의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겐슬러의 작년 매출은 13억 달러. 올해 81세인 창립자 아서 겐슬러는 현재 고문 직을 맡아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겐슬러 본사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한 아서 겐슬러. 사진=US 포춘

나는 다섯 살 때부터 건축가가 되고 싶었다. 나는 브루클린 출생으로, 아버지는 건축 자재 회사 영업사원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판매와 소통, 그리고 고객 서비스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셨다.

나는 1958년 코넬 대학 건축예술학부(Cornell University’s College of Architecture, Art and Planning)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럼에도 52회에 걸친 구직 인터뷰 끝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디자인한 회사의 시급 2.5달러짜리 일을 겨우 구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아내 드루 Drue, 아들 둘과 함께 뉴욕 라구아디아 공항 근처 퀸즈에 있는 잭슨 하이츠 Jackson Heights 지역의 한 지하 아파트에서 살았다.

나는 1962년 가족을 데리고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고, 그 곳에 있는 워스터 버너디 & 에먼스 Wurster Bernardi & Emmons라는 회사에 취직을 했다. 당시 그 회사는 BART(Bay Area Rapid Transit) 고속철도 시스템의 건축표준을 구축하는 계약을 따낸 상태였다. 나는 처음에 작은 팀에서 일을 시작했고, 나중에는 전체 업무를 담당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코넬 대학 동창과 술 한잔을 하게 됐다. 그는 알코아 빌딩 Alcoa Building이라는 신축 건물에서 ‘세입자 개발’ 프로젝트를 담당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나는 그게 어떤 프로젝트인지 물은 뒤, “3개월만 주면 내가 해낼 수 있다”고 그를 설득했다. 그리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지금 수중에 200달러 밖에 없기 때문에, 가족 부양을 위해 2주에 한번씩 급여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내 제안을 수락했다. 나는 윌리엄 워스터 William Wurster에게 회사를 차리고 싶은데 자금이 없다고 내 상황을 설명했다. 그에게 “아침에는 회사 일을 처리하고 오후에는 개인 업무를 볼 수 있느냐”고 물었고, 결국 허락을 받아냈다. 나는 그런 식으로 3개월간 일을 했다.

모험을 하기 위해선 예상치 못한 기회를 잡아야 하고, 그만큼 자기 자신도 믿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1965년 가을, M. 아서 겐슬러 주니어 & 어소시에이츠 M. Arthur Gensler Jr. & Associates Inc.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사무실 관리를 맡은 아내 외에 한 명의 직원을 고용했다. 나에겐 사업 계획도 돈도 없었지만, 무언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었다.

사무실을 빌린 후, 나무 스툴 *역주: 등받이와 팔걸이가 없는 의자 에 앉아 문들을 제도판 삼아 T자로 설계를 해나갔다. 처음에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다. 당시 회사에서 가져간 월급은 1,200달러였다. 나는 돈 빌리는 것을 좋아 하지 않아, 받아야 할 돈이 있을 때 사람들을 들볶기도 했다.

알코아 빌딩에 세입자가 들어오면,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공간을 만들 수 있도록 계획을 짜주었다. 이는 임대 계약을 체결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건축 개발업자로부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인테리어 디자인 비용은 세입자가 냈다. 이 일을 통해 우리는 건축 개발 업자들, 부동산 업자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다른 고객들을 소개해주었다.

우리는 입소문 덕분에 뱅크 오브 덴버 Bank of Denver의 인테리어 디자인 및 계획 프로젝트를 따낼 수 있었다. 덴버는 캘리포니아 바깥에선 처음으로 사무실을 오픈한 곳이었다. 그 후 펜조일 Pennzoil이 우리를 고용해 휴스턴에도 사무실을 열게 되었다. 우리는 항상 작업이 진행되는 도시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 곳에서 영구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해나갔다. 첫 해의 매출은 20만 달러 정도였다.

그렇게 1년 반이 지나자, 나도 이젠 기업체를 운영하는구나 라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UC 버클리 익스텐션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Extension 코스에 등록했다.그러다 야간 수업을 3주간 수강한 후, 내 배움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자문역으로 한 교수를 고용했고, 그는 매주 화요일 저녁에 나를 포함한 8~9명의 학생들에게 맞춤형 수업을 해주었다. 그렇게 기업 경영에 대한 미니 MBA 과정을 밟아갔다. 시험은 우리 회사의 실무를 중심으로 치러졌다.

나는 ‘건축가들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1968년 이익 공유제를 시작했다. 1988년에는 종업원지주제도(ESOP: Employee Stock Ownership Plan)도 도입했다. 우리 회사는 보통 2주 치 급여를 크리스마스 보너스로 주고, 한달 치 급여를 6월에 보너스로 지급하고 있다. 형편이 어려운 직원들에게 가장 먼저 보너스를 주고, 고위 간부들은 맨 마지막에 지급한다. 여러 차례 경기 침체기를 거치는 동안 직원들을 해고하고, 나 스스로도 월급을 받지 못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약 30년 전, 나는 한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나는 디자인에 대한 연설을 했고, 스티브 잡스는 컴퓨터가 하는 일에 대한 강연을 했다.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눴고, 잡스는 애플의 첫 소매점 100곳의 디자인을 해달라고 우리 회사에 요청했다. 직원 한 명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일을 수주하자, 이를 불쾌하게 여긴 잡스가 우리와 관계를 끊었다. 하지만 우리 회사는 그가 사망한 후 애플과 다시 일을 할 수 있었다.

사업 초창기 얻은 교훈 중 하나는 경쟁사 때문에 프로젝트에서 탈락했을 때 배운 것이었다. 나는 그 때 매우 화가 났다. 그래서 경쟁사의 주요 직원 한 명이 우리 회사에 입사하고 싶다고 했을 때 그를 고용했다. 그가 이직한 이유는 대형 프로젝트 진행과 대규모 경비지출 계좌에 욕심이 나서였다. 나는 그를 해고했고, 그 때 경쟁사에 대한 앙심 때문에 그 직원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고용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 때 확실한 검증이 이뤄지지 않았을 경우, 일을 서둘러선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현재 우리 회사는 이직자에게 바로 직함을 주지 않는다. 직원들은 1년 간 근무하면서, 겐슬러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는지 증명을 해야 한다.

나는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고, 얼마나 그들과 ’밀당‘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은 회사 사업과 디자인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위대한 건축은 건축가, 디자이너, 고객 사이의 팀워크 결과로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2010년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남은 주식도 모두 처분했다. 이제는 몸이 점점 늙어가고 있어 회사가 영원히 존속하는 것을 보는 것이 남은 내 목표 중 하나가 됐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젠 그만 물러나 다른 이들에게 길을 터주라”라고 조언을 해왔다. 다음 세대가 책임감을 갖고 회사를 이끌어 나가도록 말이다.

나는 현재 회사 고문으로서 내 업무에 만족하고 있다. 비영리단체 세 곳의 이사도 겸하고 있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나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오직 앞만 바라볼 뿐,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내 최고의 조언 아서 겐슬러, 겐슬러 창립자

● 고객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을 존경하고, 믿음직한 조언자가 돼라. 그러면 그들은 당신을 계속 다시 고용할 것이다. 고객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면, 당신은 피고용인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다.

● 인재들의 복귀를 환영하라. 우리는 직원이 다른 직업을 구하거나 배우자의 전직 때문에 퇴사할 경우, 뛰어난 인재들에겐 회사가 나중에라도 그들을 다시 받아줄 것이란 점을 분명하게 알리고 있다. 떠난 직원들이 복귀하면, 회사는 최초 입사일과 퇴사일, 재입사일을 새긴 부메랑을 선물한다. 현재 우리 회사 직원의 5%가 이런 ‘부메랑족’이다.

● 사일로 *역주: 조직 간 장벽이나 부서 이기주의를 뜻하는 말 가 아니라 하나의 기업이 돼라. 우리는 정보 공유를 위해 월요일 아침마다 47개 지부와 전화통화를 한다. 아시아에서 시작해 중동, 유럽을 거쳐 미국에서 끝난다. 대화 내용은 당일 오후 문서로 작성된다. 우리가 공유하는 것은 자금, 인재, 고객이다. 뉴욕에 있는 고객이 시카고에서 일을 진행하고 싶다면, 최고 적임자가 그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15 (엘림넷 빌딩) 1층
  • 대표전화 : 02-6261-6149
  • 팩스 : 02-6261-6150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노경
  • 법인명 : (주)에이치엠지퍼블리싱
  • 제호 : 포춘코리아(FORTUNE KOREA)
  • 등록번호 : 서울중 라00672
  • 등록일 : 2009-01-06
  • 발행일 : 2017-11-13
  • 발행인 : 김형섭
  • 편집국장 : 유부혁
  • 대표 : 김형섭
  • 사업자등록번호 : 201-86-19372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2021-서울종로-1734
  • 포춘코리아(FORTUNE KOREA)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포춘코리아(FORTUNE KOREA).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kpark@fortunekorea.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