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콘텐츠는 FORTUNE KOREA 2019년 8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Reverso는 예거 르쿨트르의 아이코닉 컬렉션으로 다이얼을 180도 회전할 수 있는 리버스 케이스가 특징이다. Reverso 컬렉션은 예거 르쿨트르가 현재 하이엔드 ‘완성시계’ 브랜드로 정체성을 굳히는데 큰 기여를 했다.◀
[Fortune Korea] 예거 르쿨트르는 의심할 여지 없는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이다.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로서 예거 르쿨트르의 저력은 무브먼트 개발과 제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샤를 앙트완 르쿨트르 Charles Antoine LeCoultre가 1833년 스위스 르상티에에서 창업한 이래 예거 르쿨트르가 현재까지 개발한 무브먼트 수는 1,200개가 훌쩍 넘는다. 말 그대로 독보적이어서 완성 시계 브랜드 중에서는 비교 대상조차 찾지 못할 정도이다.
1931년 론칭한 Reverso 컬렉션은 이런 예거 르쿨트르가 완성 시계 브랜드로 좀 더 집중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올해 론칭 88주년을 맞는 Reverso 컬렉션은 예거 르쿨트르 아이코닉 컬렉션으로, 또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시계 컬렉션 중 하나로 성장했다.
◆ 무브먼트 제작의 귀재
1930년대 이전까지 예거 르쿨트르의 가장 큰 문제는 무브먼트를 너무 잘 만들어 정작 완성시계 제작엔 소홀하다는 것이었다. 인하우스 무브먼트 자긍심이 하늘을 찌르는 하이엔드 브랜드조차도 예거 르쿨트르와의 협업을 위해 고개를 숙일 정도였으니 예거 르쿨트르 입장에선 굳이 완성시계 제작에 집중할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당시 예거 르쿨트르의 무브먼트 개발 수준은 다른 시계 제조사와 차원을 달리했다. 1928년 출시한 Atmos 무브먼트는 온도 변화를 에너지로 전환해 사용하는 획기적인 시스템으로, 이듬해인 1929년 론칭한 101 무브먼트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기계식 무브먼트(길이와 무게가 각각 15mm, 1g 미만 / 현재까지도 가장 작은 무브먼트 기록)로 주목받았다.
물론 예거 르쿨트르가 단순히 무브먼트만 제작한 것은 아니었다. 1907년 1.38mm 두께의 세상에서 가장 얇은 포켓워치라든가 1928년 Atmos 무브먼트를 사용한 Atmos Pendulum 탁상시계 등을 선보이며 예거 르쿨트르는 완성시계 제작업체로서도 존재감을 뽐냈다. 하지만 이들 시계는 ‘우리가 이렇게 뛰어난 무브먼트를 만듭니다’를 보여주기 위한 과시용일 뿐, 상업용 시계라고 생각하기엔 제작 라인이 너무 협소했다.
◆ Reverso 탄생 비화
무브먼트 제조사인지 완성시계 제조사인지 업체들도 예거 르쿨트르 정체성에 혼란을 느낄 무렵 예거 르쿨트르에 재밌는 의뢰 하나가 들어왔다. 당시 인도에 주둔 중인 영국군들은 폴로 경기를 곧잘 하곤 했는데, 폴로가 워낙 거친 운동이다보니 경기 중 시계 유리가 깨지는 사례가 많았다. 경기 중엔 시계를 잠시 풀어두면 그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영국 신사가 이런 일로 손목을 비워놓는 건 당시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영국군은 폴로 경기 때도 찰 수 있는 견고한 시계 제작을 예거 르쿨트르에 의뢰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에도 폴로 스틱을 맞고도 버틸 수 있는 시계 유리는 찾기가 어려웠다. 예거 르쿨트르는 초고강도 유리를 개발하는 대신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이 의뢰를 해결했다. 필요할 때마다 다이얼을 180도 회전할 수 있는 리버스 케이스를 만들고 다이얼 반대편을 매우 단단한 철판으로 대체하는 방법이었다. 1931년 Reverso 컬렉션의 탄생이었다.
예거 르쿨트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Reverso 컬렉션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당시 Reverso 컬렉션이 인기를 끈 건 스포츠 활동 중에도 찰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단 다이얼 반대편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더 크게 작용했다. 다이얼 반대편을 철판 대신 고급 소재로 바꾸고 인그레이빙 등으로 장식하면 훌륭한 장신구로도 사용 가능했기 때문이다.
◆ 드레스 워치로 변모
1930년대 예거 르쿨트르는 여전히 무브먼트 개발과 제작에 더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밀려드는 Reverso 컬렉션 주문을 처리하다보니 어느새 완성시계 제조업체 이미지가 더 강하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고객마다 천차만별인 다이얼 뒤편 요구사항을 들어주기 위해 세공과 같은 마감 부서 규모가 훨씬 커졌고 이 덕분에 무브먼트 개발 위주의 비대칭 조직 구성도 균형을 이뤘다.
재밌는 건, 당시 예거 르쿨트르의 이미지 변화와 마찬가지로 Reverso 컬렉션 역시 이미지 변화를 겪고 있었다는 점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Reverso 컬렉션은 거친 활동 중에도 착용할 수 있는 스포츠 워치로 개발됐지만, 다이얼 반대편의 활용성 때문에 점점 드레스 워치로 이미지가 변해갔다.
시간이 더 지나서는 케이스 앞뒤를 모두 다이얼로 활용하는 Duetto, 한 발 더 나아가 다이얼 양면에 투타임존을 올린 Duetto Duo 등으로 라인 분화를 거치면서 Reverso 컬렉션은 완벽한 드레스 워치로 변모했다. 현재는 다이얼 반대편이 그냥 금속인 버전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이다.
◆ 현재진행형 신화
2000년대 들어선 케이스 앞뒤 면에 이어 케이스 받침판까지 다이얼로 활용한 3면 Reverso 컬렉션 모델 Tryptique가 등장했다. 2006년 출시한 Reverso Grande Complication à Triptyque는 앞면과 뒷면, 받침판 다이얼에 각각 상용시, 항성시, 퍼페추얼 캘린더를 올리는 초고난도 컴플리케이션 기술을 구사해 세계 시계 엔지니어들을 감탄케 했다.
당시 시계 엔지니어들의 반응은 놀라운 것이었다. 투르비용과 조디악 캘린더, 스카이 차트, 균시차, 일출·일몰 표시기 등 시계 하나에 담기에도 어려운 기능을 무려 18개나, 그것도 쓰리 파트 손목시계에 올린 것은 둘째치고 쓰리 파트에 어떻게 동력이 끊이지 않고 연속적으로 전달되는지 그 기계적 원리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예거 르쿨트르의 Reverso 컬렉션 신화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2016년에는 3차원 회전 투르비용인 자이로 투르비용을 장착한 Reverso Tribute Gyrotourbillon을, 2018년에는 플라잉 투르비용을 장착한 Reverso Tribute Tourbillon Duoface를 선보였다. Reverso Tribute Gyrotourbillon은 예거 르쿨트르의 특별 컬렉션 명칭 ‘Hybris Mechanica’가 붙을 정도로 엔지니어들의 자부심이 가득했던 모델이었다.
이처럼 Reverso 컬렉션 시계들은 확실히 특별한 면모가 있다. 예거 르쿨트르 브랜드 내에서 가지고 있는 역사적 가치도 상당하지만 그 특별한 디자인이나 기술을 고려하면 전체 시계 브랜드에 있어서도 가히 보물이라 불릴 만하다. Reverso 컬렉션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 나갈지 또 90주년을 맞는 2021년에는 또 어떤 특별한 시계를 내놓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김타영 기자 seta1857@hmg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