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콘텐츠는 FORTUNE KOREA 2019년 6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시계 브랜드 이야기] ⑧ 파네라이 기사도 함께 읽어보세요!>
▶파네라이는 전통적인 디자인 유산을 계승하는 브랜드다. 1930~1940년대 이탈리아를 휩쓴 ‘이탈리아식 합리주의’ 미학양식이 현재까지도 파네라이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파네라이는 이같은 독특한 디자인 취향을 지키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다른 사람이 찬 시계를 보고 단박에 그 시계 브랜드를 알아맞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아이코닉한 모델이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시계 브랜드들도 컬렉션이나 출시 연도에 따라 디자인을 많이 바꾸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 평소 눈에 익은 모델을 만났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그냥 알아채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상대방의 시계 브랜드가 궁금하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직접 물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아주 일부, 특히 명품 시계 브랜드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슬쩍 흘려보고도’ 십중팔구 알아맞힐 수 있는 시계 브랜드도 있다. 바로 파네라이다. 특유의 부드러운 쿠션형 케이스에 파네라이 시계 대부분이 채택하고 있는 레버가 달린 크라운 보호장치(라디오미르 컬렉션과 포켓워치를 제외한 모든 모델에서 채택하고 있다)나 샌드위치 다이얼, 동글동글 귀여운 아라비아 숫자 인덱스 중 하나까지 추가로 확인했다면 90%는 확정적이다. 그 시계가 혹여나 짝퉁일지언정 로고는 분명 PANERAI가 찍혀 있을 것이다.
◆ 보수적인 디자인
파네리스트(Paneristi·열정적인 파네라이 마니아들을 지칭하는 용어)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파네라이는 시계 브랜드 중 굉장히 보수적인 디자인 취향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보수적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클래식한 이미지를 추종한다는 뜻과 큰 변화 없이 제한적인 디자인 스펙트럼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파네라이는 자신을 스스로 ‘럭셔리 스포츠 워치 브랜드’로 규정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파네라이를 스포티한 이미지로 생각하는 이들은 매우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파네라이 시계 디자인은 비교적 점잖은 축에 속해 정장이나 캐주얼한 의상에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스포티한 활동에 파네라이 시계를 매칭시키는 사람은 파네라이 홍보 모델 외에는 없을 것’이란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이다.
이 같은 파네라이의 독특한 면모는 이탈리안 워치 브랜드라는 특수성에 기인한다. 파네라이 현재 디자인이 정립된 1930~1940년대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식 합리주의’ 미학 양식이 확산하고 있었다. ‘사물의 형상은 반드시 그 기능을 반영해야 한다’는 건축 분야 미학 원칙이었던 이탈리아식 합리주의는 이 시기 거의 모든 분야로 번져나갔는데, 파네라이도 이 영향을 받았다.
이탈리아식 합리주의는 제조업 분야에서 엄숙함과 엄격함에 대한 찬미, 또는 단순하고 심플한 것에 대한 추종 경향을 만들어냈다. 파네라이 역시 이런 경향을 적극적으로 흡수해 시계 제작에 반영했다. 이탈리아 해군에 납품하던 기능성 시계조차도 마치 합리주의자의 프로젝트 기획물인 양 미니멀하고 심플하게 디자인했을 정도이다. 이 시기 디자인 경향은 파네라이 디자인의 모태가 돼 현재까지도 파네라이 시계들은 큰 틀에서 비슷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 장점이자 단점?
현대까지도 이어지는 이 독특한 디자인 취향은 파네라이의 큰 장점이 됐다. 오랜 세월 고집스럽게 이어온 시계 디자인은 그 자체가 파네라이 심볼로 인식돼 특히 마케팅 분야에서 많은 도움이 됐다. 1993년 이탈리아 기밀 족쇄(파네라이는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해군 군납을 담당했던 까닭에 긴 시간을 시장 뒤편에서 암약해야 했다)에서 풀려난 지 고작 십수 년 만에 글로벌 명품 시계 브랜드로 거듭난 것도 파네라이 디자인의 특수성이 큰 역할을 한 덕분이다.
하지만 이런 디자인 특수성이 매번 장점으로만 기능한 것은 아니었다. 파네라이는 거의 매년 신제품을 출시했지만 비슷한 디자인 덕분에 다른 시계 브랜드 대비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열성적인 파네리스트들은 ‘작지만 큰 변화’로 해석하며 아주 사소한 변화에서도 큰 의미를 찾지만, 라이트한 일반 고객 입장에서는 이전 제품들과 차이를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사례가 많았던 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사례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경험이 쌓이면서 파네라이도 자사 디자인 유산을 지키면서도 시계 마니아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들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전통적인 케이스의 크기 변화나 특별한 소재 사용, 과거와 연결된 인하우스 무브먼트 론칭 등이다.
◆ 38mm 모델 출시
근래 파네라이에서 가장 이슈가 된 건 지난해 Luminor Due 컬렉션을 통해 38mm 모델을 선보인 것과 2014년 마이크로 로터를 장착한 오토매틱 무브먼트 P.4000을 론칭한 것이다. 38mm 모델과 마이크로 로터 무브먼트 출시 모두 파네라이 역사 최초 시도들이다.
파네라이는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남성 시계만 집중하는 시계 브랜드로 유명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시계에 관심을 가지는 여성이 많아지면서 파네라이 시계를 착용하는 여성들도 함께 늘어나 파네라이를 당혹스럽게 했다. 파네라이 시계는 대부분이 44mm 이상 크기를 자랑했지만 부드러운 이미지 덕분에, 또 손목에 올려놓으면 실제 크기보다 작아 보이는 쿠션형 케이스 덕분에, 착용자 마음대로 스트랩을 바꿔서 쓸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여성들에게도 큰 인기를 끈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 아시아에서 명품 시계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파네라이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클래식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아시아인의 수요는 파네라이와 맞아떨어졌지만, 40mm 중반대 크기가 아시아인들에게 부담스럽다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는 오버사이즈 유행이 저물어가는 시기여서 40mm 중반대 크기의 시계로는 아시아시장에서 주목 받기가 어려웠다.
파네라이는 케이스 크기를 조절하는 시도를 통해 방법을 찾았다. 2014년 마이크로 로터를 적용한 파네라이 최초 오토매틱 무브먼트 P.4000을 출시하며 그 기반을 마련했고, 2016년엔 시계 두께를 최대 40%까지 줄인 Luminor Due 컬렉션을 론칭해 기존 시계들과 구별되는 섹터를 만들었다. 2018년 파네라이는 Luminor Due 컬렉션을 통해 38mm 모델을 출시하며 여성시장과 아시아시장의 니즈를 동시에 충족시켰다. P.4000 무브먼트는 이후 P4001, P4002 무브먼트로 발전했다.
◆ 특별한 소재 사용
파네라이는 특별한 소재 사용으로도 시계 마니아들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보통 시계 브랜드들의 특별한 소재 사용은 기능적인 측면을 고려한 선택이 많지만, 파네라이는 소재로 제한적인 디자인 스펙트럼을 확장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파네라이는 2015년 Carbotech 소재를, 2017년에는 BGM-Tech 소재를 올해는 에코 티타늄 소재를 도입하는 등 최근 신소재 도입에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브론즈, 5Npt 레드 골드, AISI 316L 합금 등 하이테크 외 소재까지 고려하면 파네라이 신소재 외연은 훨씬 넓어진다.
이들 중 특히 Carbotech는 파네라이 여러 소재 중 꼭 짚고 넘어갈 만하다. BGM-Tech가 매우 뛰어난 소재라고는 해도 짙은 그레이 컬러를 띄는 티타늄과 비슷해 디자인 외연 확장 한계가 분명한데 반해, Carbotech 소재는 기능과 디자인 확장 모두에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하기 때문이다.
Carbotech는 가볍고 강인한 특성이 있는 탄소섬유 베이스의 복합소재다. 세라믹보다 충격에 훨씬 강하고 부식에도 강한 내성을 갖는다. 파네라이에서 Carbotech 사용이 유독 주목받는 건 Carbotech 특유의 불규칙하고 매트한 무광 검은색 표면 때문이다. 커팅 시 다양한 무늬가 나타나 제품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독창적인 매력을 갖고 있다. 제한적인 디자인 특징을 가진 파네라이로서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재인 셈이다.
◆ 오마주 무브먼트
파네라이의 역사적 모델을 연상케 하는 무브먼트 출시는 다소 이색적인 면이 있다. 보통 다른 시계 브랜드들은 역사적 모델을 연상케 하는 오마주 시계 출시가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파네라이는 무브먼트에 집중한다. 과거 모델의 디자인 유산을 거의 그대로 따르는 파네라이는 오마주 시계 출시가 큰 임팩트가 없는 까닭에 무브먼트로 대체하는 아이디어를 낸 것으로 보인다.
이 연장선상에서 최근 가장 눈에 띄는 무브먼트는 2013년 출시한 P.5000 무브먼트이다. P.5000 무브먼트는 1940년 출시된 라디오미르 1940 시계의 무브먼트가 8일간의 파워리저브를 제공한 것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1940년은 파네라이의 다이버워치 기술력이 완성단계에 다다랐음을 확인한 기념비적인 해로 Radiomir 1940 시계는 그 강력한 증거였다. Radiomir 1940 시계는 이탈리아 왕실 해군 제1 잠수부대가 요구하는 모든 세부사항을 만족하게 한 완성형 다이버 시계로 이후 파네라이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Radiomir 1940을 별도 컬렉션 이름으로 사용해 2018년까지 유지했다.
1940년 제작된 Radiomir 1940은 Angelus 무브먼트를 사용했는데, 이 무브먼트는 당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던 8일간의 파워리저브를 제공했다. 크라운으로 태엽을 감는 핸드와인딩 기계식시계 특성상 잦은 크라운 조작은 시계 방수성 유지에 큰 걸림돌이었다. 파네라이는 크라운 조작을 줄여 방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당대 최고 수준의 파워리저브 확보에 공을 들였고 그 결과 Angelus 무브먼트를 선택하게 됐다.
당시의 경험으로 이후에도 파네라이는 8일간의 파워리저브에 강한 애착을 느꼈다. 2005년 제작된 파네라이의 첫 인하우스 무브먼트 P.2002 역시 8일간의 파워리저브를 자랑했다. P.2002는 8일간의 파워리저브뿐만 아니라 GMT 기능과 3개의 스프링 배럴 등 거의 모든 면에서 Angelus 무브먼트를 오마주한 무브먼트였다.
파네라이는 첫 인하우스 무브먼트 이후에도 지속해서 8일간의 파워리저브를 제공하는 무브먼트 제작에 공을 들였다. 2007년 P.2004 개발에 이어 2008년에는 P.2006을 거쳐 2013년엔 P.5000를 선보였다. 2007년에는 10일간의 파워리저브를 제공하는 P.2003 무브먼트도 동시에 선보여 주목을 받기도 했다.
◇ 마이크로 로터란?
이름처럼 크기가 작은 로터이다. 무브먼트 뒷면 가운데 위치해 무브먼트 직경만큼이나 큰 풀 로터와 달리 무브먼트 한쪽 구석에 무브먼트 1/4 크기로 들어가 있다. 크기가 작은 만큼 22K 골드 등의 무거운 소재를 사용해 회전력을 높인다.
마이크로 로터는 무브먼트 두께를 줄이거나 다른 컴플리케이션 부품이 들어갈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사용한다. 파네라이에서는 ‘오프 센터 마이크로 로터’ 혹은 ‘편심(偏心) 마이크로 로터’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마이크로 로터는 태생적으로 오프 센터이면서 편심일 수밖에 없어 일반적으로는 마이크로 로터라고 부른다.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