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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조양호 회장의 타계, 그리고 한진 그룹의 미래

  • 기사입력 2019.05.03 14:07
  • 기자명 하제헌 기자

<이 콘텐츠는 포춘코리아 FORTUNE KOREA 2019년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1974년 대한항공에 입사한 후 45년간 한국 항공산업을 이끌어 온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4월 8일 새벽 미국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는 대한항공에 몸담은 이래 반세기 동안 ‘수송보국’ 일념 하나로 대한항공을 글로벌 선도항공사로 이끌어왔다. 조 회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한진그룹 오너 일가는 경영권 확보에 비상등이 켜졌다. 현재 취약한 지배구조와 수천억 원 대의 상속세, 행동주의 사모펀드와 국민연금 등의 견제 속에 장남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상황이다. 하제헌 기자 azzuru@hmgp.co.kr]

대한항공 격납고에서 포즈를 취한 고(故) 조양호 회장. 사진 대한항공 제공.
대한항공 격납고에서 포즈를 취한 고(故) 조양호 회장. 사진 대한항공 제공.

4월 16일 오전 6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영결식이 유족과 한진그룹 임직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영결식은 구슬픈 진혼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진행됐다. 조 회장의 세 손자가 조 회장의 위패와 영정사진을 나눠 들고 선두에 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조 회장의 장남인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과 장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차녀 조현민 전 진에어 부사장 등 직계 가족들이 뒤를 따랐다. 영결식에 참석한 이들은 눈시울을 훔치며 조 회장이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했다.
장례식장 1층에서는 1984년 대한항공 입사 후 35년간 조 회장과 함께 일하며 최측근으로 꼽혀온 석태수 한진칼 대표와 조 회장의 오랜 친구인 현정택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조 회장의 6촌 형제인 조지호 한양대 명예교수가 추모사를 낭독했다.
석 대표는 “회사를 위해, 나라를 위해 오로지 수송보국의 일념으로 걸어왔지만, 스스로 감당해야만 했던 삶의 무게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무거웠을 것”이라며 “이제야 어렴풋이 느껴지는 그 무게에 가슴이 한없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추모사가 끝난 후 장례식장에 마련된 영상기기를 통해 조 회장의 생전 활동을 담은 영상이 상영됐다. 7분여간 상영된 영상에는 조 회장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경영을 진두지휘 하는 모습,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비롯한 스포츠 외교활동에 헌신한 모습 등이 담겼다.
영결식이 끝난 뒤 조 회장의 운구 행렬은 서울 서소문 대한항공 빌딩으로 거친 뒤 고인이 생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강서구 공항동 대한항공 본사로 이동했다. 대한항공 임직원들은 본사 앞 도로와 격납고 등에 모여 영면에 들기 전 조 회장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운구차는 1981년부터 2017년까지 36년 동안 조 회장과 함께 했던 이경철 전 차량 감독이 운전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이 전 감독이 2년전 회사를 떠났지만, 평생 조 회장을 안전하게 모셨던 것처럼 마지막 가는 길도 편안히 모시고 싶다는 뜻을 밝혀 운전대를 맡겼다”고 전했다.
이날 조 회장은 선친인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와 어머니 김정일 여사가 안장된 경기도 용인시 하갈동 신갈 선영에 안치됐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이렇게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대한민국 항공산업의 선구자
“항공사와 여행사는 갑을 관계입니다. 예전부터 여행사에 서는 좋은 조건으로 항공권을 사기 위해 항공사 판매담당 직원들에게 뒷돈을 주는 관행이 있었어요. 그런데 조양호 회장 취임 후 대한항공에서는 이 관행이 싹 사라졌습니다. 여행업계 사람들은 조양호 회장님을 높게 평가합니다.” 조양호 회장 사망 후 국내 한 여행사 대표가 전한 말이다.
조양호 회장은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장남이다.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과 결혼해 1남 2녀를 뒀다. 장녀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장남은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 차녀는 조현민 전 진에어 부사장이다.
조 회장은 인하대 공업경영학과를 졸업한 이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인하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양호 회장은 재계에서는 ‘순둥이’로 통했다. 선친인 조중훈 회장이 첫째 아들인 조양호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주는 걸 망설였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조양호 회장이 직책을 수행하기에는 심성이 너무 ‘무르다’고 봤다는 것이다.
조 회장은 1974년 12월 대한항공에 입사한 이래 항공•운송사업 외길을 45년 이상 걸어온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국내외를 통틀어 조양호 회장 이상의 경력을 지닌 항공•운송 전문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는 정비, 자재, 기획, IT, 영업 등 항공업무에 필요한 전 부서들을 두루 거쳤다. 
조양호 회장은 1974년은 1차 오일쇼크가 한창인 시절 대한항공에 처음 발을 들였다. 연료비 부담으로 미국 최대 항공사였던 팬암과 유나이티드항공은 직원 수 천 명을 감원할 정도였다. 하지만 조양호 회장은 선친인 조중훈 창업주와 함께 줄일 수 있는 원가는 줄이되, 시설과 장비 가동률을 높여 불황에 호황을 대비하는 선택을 했다. 이는 오일쇼크 이후 중동 수요 확보 및 노선 진출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97년 외환 위기 당시에도 자체 소유 항공기 매각 후 재임차 등을 통해 유동성 위기에 대처했다. 조양호 회장은 북미와 유럽의 LCC(저비용항공사• Low Cost Carrier) 시장 동향을 눈여겨봤다. 2005년 국내 첫 LCC인 한성항공(현 티웨이항공)이 취항했다. 기존 대형 항공사보다 서비스는 뒤지지만 절반 정도 저렴한 운임을 제공하는 LCC의 성장은 거스를 수 없는 항공 시장의 거대한 변화를 의미했다. 새로운 기류에 대응하기 위해 조양호 회장은 2008년 진에어를 취항시켰다. 당시 항공담당 기자들 조차 진에어 출범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가지고 있었다. 대한항공 내 한 부서로 진에어를 두는 게 낫지 않냐는 시선도 있었다. 당시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그룹 회장은 전경련 회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대한항공이 굳이 저가항공을 출범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조양호 회장이 생각은 분명했다. 국내서도 LCC가 크게 성장할 것이며, 이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말한다. “조 회장은 대한항공은 하이엔드로, 진에어는 로우엔드로 간다는 생각이 명확했습니다. 결국 아시아나항공도 에어부산을 설립해 LCC사업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만큼 항공산업에 대한 조 회장의 식견이 넓고 깊었다는 겁니다.”
조 회장은 2003년 한진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2009년에 2018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항공업계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이렇게 말했다. “조양호 회장에게 평창올림픽 유치 위원장을 맡긴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조 회장은 술•담배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일만 하는 스타일이었죠. 정부에서도 이런 점을 파악하고 조 회장에게 3수생이던 평창을 맡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 회장은 세계 항공업계에 폭넓은 인맥과 해박한 실무지식으로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스카이팀 등 국제 항공업계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러나 오너가의 끊임 없는 논란에 최근 1999년부터 맡았던 대한항공 대표이사직에서 내려오기도 했다. 지난 2014년 12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항공기 회항을 지시한 ‘땅콩회항’ 사건을 시작으로 여론이 악화했고, 조양호 회장은 해당 사태에 직접 사과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오너 일가의 ‘물컵 갑질’, 폭행 및 폭언 등 논란에 연루되며 한진 오너가에 대한 여론이 나빠졌다.
이에 올해 들어서 조 회장은 핵심 계열사 업무에 집중, 겸직 계열사를 9개사에서 3개사로 대폭 줄인다고 발표했다. 지주회사인 한진칼, 그룹의 모태인 ㈜한진, 그룹 핵심 계열사인 대한항공 등 3개사 이외의 계열사 겸직을 내려놓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대한항공에서도 주주들의 결정에 의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 조 회장은 지난 3월 대한항공 정기 주주총회 결과에 따라 1999년부터 맡았던 대한항공 대표이사직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조 회장의 경영 능력과 항공•운송분야에서 쌓아온 업적은 국내 항공업을 도약으로 이끌었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평가다. 재계 관계자는 “조 회장은 최상의 서비스야말로 최고의 항공사를 평가 받는 길이라고 보고 고객중심 경영에 주력해왔다”며 “이 같은 경영 리더십으로 대한항공을 세계적 항공사로 성장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항공은 2000년 조양호 회장의 주도로 아에로멕시코·에어프랑스·델타항공 등과 세계적 항공 동맹체 ‘스카이팀’을 창설했다. 사진 대한항공 제공.
대한항공은 2000년 조양호 회장의 주도로 아에로멕시코·에어프랑스·델타항공 등과 세계적 항공 동맹체 ‘스카이팀’을 창설했다. 사진 대한항공 제공.

▶포스트 조양호 체제 가동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은 조양호 회장 영결식 다음 날인 4월 17일 아침 강서구 공항동 본사로 출근해 경영 일선에 빠르게 복귀했다. 조 사장은 복귀 첫날 사내게시판에 직접 글을 올려 장례식 5일 동안 선친의 장례를 돕고 조의를 표한 임직원들을 일일이 거론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와함께 어수선한 조직을 추스르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며 자신이 그룹 경영을 주도할 것임을 시사했다.
조 사장은 직원들을 향해서는 “여전히 마음은 무겁지만, 우리에게는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다”며 “임직원 모두가 자부심을 느끼고 고객과 국민이 신뢰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한항공이 되도록 새로운 마음, 하나 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고 당부했다. 조 사장의 이런 메시지를 두고 회사 안팎에서는 그가 조양호 전 회장에 이어 대한항공과 한진그룹을 책임지고 이끌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했다.
재계에서는 조 사장이 선친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숙제가 된 경영권 승계를 차근히 진행하면서 본인의 경영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선을 거두어내려 적극적인 경영 행보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첫 무대는 6월 1∼3일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항공운송협회(IATA) 총회가 될 전망이다. 조 사장이 ‘포스트 조양호’ 시대 리더로 전면에 부각되는 계기로 삼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IATA는 1945년 세계 각국의 민간 항공사들이 모여 설립한 국제협력기구로, 현재 120개국 287개 민간 항공사가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다. IATA 총회는 글로벌 주요 항공사들과 보잉•에어버스 등 항공 관련 업계 최고위층이 모여 항공산업 전반을 논의하는 자리로, ‘항공업계의 유엔 총회’로도 불린다.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이번 총회는 조양호 전 회장이 유치를 주도했다.
조양호 전 회장은 IATA 최고기구 집행위원을 지내는 등 국제항공업계에서 쌓은 탄탄한 신뢰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서울총회 유치를 성사시켰다. 하지만 지난 3월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직을 박탈당하며 CEO 지위를 잃어 조 전 회장이 IATA 서울총회 의장 자격이 있는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런 논란은 조 전 회장이 별세하면서 자연히 해소됐다.
IATA 서울총회 의장은 대한항공 CEO인 우기홍 부사장과 조원태 사장 두 사람 모두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한항공은 이미 내부적으로 조원태 사장이 의장직을 수행하기로 정리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 사장은 IATA 서울총회를 세계 무대에서 ‘대한항공은 조양호’로 통용되던 등식을 ‘대한항공은 조원태’로 바꾸는 계기로 활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조 사장이 IATA 총회라는 큰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할 것으로 보인다”며 “선친이 생전에 쌓아 둔 글로벌 네트워크와 협력관계를 충실히 계승하고 경영 기반을 다지는 기회로 십분 활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원태 사장은 지금까지 그룹•대한항공 경영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대표이사•사장에 오른 지 2∼3년밖에 되지 않은 점도 이유로 볼 수 있지만, 조양호 전 회장이 건재한 상황에서 ‘3세 경영으로 전환’ 등 말이 나오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기는 분위기도 회사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조 사장은 대한항공에서 ‘CEO’가 아닌 ‘COO(최고운영책임자)’ 직함을 달고 활동했다.

대한항공은 2018년 5월1일부터 델타항공과 태평양 노선 조인트벤처를 시행해 미주와 아시아 노선에서 항공편을 공동운항하며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사진 대한항공 제공.
대한항공은 2018년 5월1일부터 델타항공과 태평양 노선 조인트벤처를 시행해 미주와 아시아 노선에서 항공편을 공동운항하며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사진 대한항공 제공.

▶불확실한 경영권 승계 시나리오
대한항공은 조 회장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경영 공백이 생기면서 조원태 사장 중심 체제로의 전환이 불가피하게 됐다. 그동안 대한항공은 국민연금과 사모펀드 KCGI의 지배구조 개선 요구를 받아 왔다. 여기에 3세들이 경영권 승계를 하고자 한다면 막대한 상속세를 내야 하는 등의 난관이 적지 않아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이다.
조양호 회장에게는 조 사장을 비롯해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 조현민 대한항공 전 전무 등 세 명의 자녀가 있다. 하지만 장녀 조현아 전 부사장, 차녀 조현민 전 전무가 이른바 ‘갑질 논란’으로 현재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다. 그 결과 오너 일가 중 유일하게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조 사장의 경영권 승계가 가장 유력하다.
그렇다고 조 사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가 순조롭게 이뤄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승계 준비를 거의 하지 않은 데다 그룹 안팎에 악재가 겹친 때문이다. 조 사장은 최근 몇 년간 ‘갑질 논란’과 ‘실적 하락’에 시달려 왔다. 여기에 행동주의 펀드 KCGI의 경영권 위협과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지침) 발동 등의 악재가 겹쳤다. 이 때문에 지주회사 지분 확보 등 승계를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
현재 한진그룹의 지배구조는 지주회사인 한진칼을 중심으로 ‘한진칼→대한항공•한진→손자회사’로 이어진다. 한진칼 지분은 조 전 회장이 17.84%, 조 사장이 2.34%, 조 전 부사장과 조 전 전무가 각각 2.31%, 2.30%를 갖고 있다. 조 전 회장의 한진칼 지분이 그대로 한진가로 상속되고 한진가가 똘똘 뭉친다면 한진가가 그룹 경영권을 지키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재계는 내다본다.
일단 국민연금이 지난 4월 10일부터 16일까지 총 7차례에 걸친 장내 매매를 통해 보유 중이던 한진칼 주식 74만 1,474주를 처분했다. 처분 단가는 주당 3만 1,964원에서 4만5,909원 사이다. 한진칼에 대한 국민연금의 지분율은 기존 5.36%에서 4.11%로 1.25%포인트 낮아졌다. 국민연금은 “단순 장내 매수, 매도를 통해 한진칼에 대한 지분율이 변동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내년 3월 한진칼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의 주주로서 입지와 영향력이 한층 낮아졌다는 분석이다. 국민연금이 이처럼 보유 중이던 한진칼 주식을 처분한 것은 최근 한진칼 주가 급등에 따른 차익 실현 목적으로 풀이된다. 한진칼 주가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갑작스러운 별세 이후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 장중 최고가 기준 80% 이상 치솟기도 했다.
한진칼에 대한 국민연금의 보유 지분이 5% 이하로 줄어들면서 국민연금은 이른바 ‘5% 룰’ 적용도 면하게 됐다. 5%룰이란 상장기업의 의결권 있는 주식을 5% 이상 보유한 주주 는 지분이 해당 법인 주식 총수의 1% 이상 변동된 경우 그 내용을 5일 이내에 금융감독원과 한국거래소 등에 보고하도록 의무화한 제도다. 공적연금이라는 국민연금의 특성상 지분 변동 때마다 공시를 통해 밝혀야 한다는 점은 투자 전략 노출 차원에서 부담 요인으로 지적돼왔다.
재계에서는 한진가 역시 주식 담보대출과 배당 등의 방법을 통해 상속세 마련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한진칼•대한항공•한진 등 한진그룹 상장 계열사의 지분 가치는 3,600억 원 수준으로 평가된다. 단순히 상속세율 50%를 적용해도 1,789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경영권이 있는 최대 주주 지분 상속에 붙는 20% 할증까지 감안하면 액수는 더 커질 수 있다. 다만 조 회장의 지분을 비롯해 한진가의 한진칼 지분 27%는 이미 금융권•국세청 등에 담보로 잡혀 있다. 또 지난해 한진가에서 받은 배당금은 12억 원 정도에 그쳤다.
조 회장 지분을 모두 상속받는다고 하더라도 주주 행동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KCGI와의 추가 지분 확보 경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진칼의 2대 주주인 KCGI는 지속적으로 지분을 늘리며 경영권을 위협하고 있다. KCGI는 지난해 11월 한진칼 지분 9%를 사들이며 2대 주주로 올라섰다. KCGI는 약 한 달 뒤 지분율을 10.81%로 늘렸고 올해 3월 12.68%로까지 확대했다. 4월 4일에는 한진칼 지분 0.79%를 추가하며 13.47%를 확보한 상태다.

조양호 회장은 국가의 심부름꾼 역할을 한다는 소명 의식으로 2009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았다. 사진 대한항공 제공.
조양호 회장은 국가의 심부름꾼 역할을 한다는 소명 의식으로 2009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았다. 사진 대한항공 제공.

▶실적으로 실력 보여야 할 조원태 사장
다행스러운 점은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과 달리 경영실적이나 재무 성과만큼은 탄탄하다는 점이다. 단순히 생각해 보면 수년간 누적된 오너 리스크로 인해 악화된 여론이 형성돼 이용객이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다.
하지만 오너 리스크가 발생한 기간 동안 대한항공의 재무적 성과엔 큰 변화가 없었다. 땅콩 회항 논란이 일어난 2014년부터 최근까지 대한항공 여객 탑승률을 보면 2014년 79.16%(6만 7,950명), 2015년 80.07%(7만 1,646명), 2016년 80.97%(7만 5,970명), 2017년 81.88%(7만 7,842명), 2018년 82.79%(8만1,430명)으로 매년 수요가 증가했다.
같은 기간 화물 탑재율도 2014년 76.08%(8,259개), 2015년 76.11%(8,266개), 2016년 76.15%(8,163개), 2017 년 76.18%(8,593개), 2018년 76.22%(8,289개)로 꾸준히 늘었다.
최근 5년간 매출 흐름도 상승세다. 매출액은 2014년 11조 9,097억 원에서 2018년 13조 202억 원으로 늘었다. 다만 순이익은 수년째 적자를 기록했다. 영업적인 측면이 아닌 외환 차손, 외화 환산 손실 등 환율 리스크 영향을 받았다. 이 밖에 대한항공의 5년간 평균 부채비율은 743.46%로 과거에 비해 크게 개선됐다. 순차입금도 꾸준히 줄고 있다. 재무적으로 봤을 때 대한항공은 나무랄 데가 없다.
오너 리스크와 무관하게 회사는 잘 돌아갔다. 특히 최근엔 대한항공의 항공 정비 사업(MRO)은 신성장 사업으로 거듭나고 있다. 대한항공은 현재 보유 중인 자체 정비 역량을 기반으로 해외 업체들과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OEM) 등 협력도 강화한다.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 도 항공기 유지•보수 수요를 내주지 않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진그룹에 따르면 지난해 대한항공의 MRO 사업과 타사 항공기 MRO 규모는 각각 1조 1,800억 원, 1,510억원이다. 올해는 각각 목표 매출을 1조 2,400억 원, 1,900억 원대로 상향했다. 이를 토대로 전체 MRO 사업 매출 1조 4,300억 원을 달성할 전망이다.
결국 대한항공의 위기는 실적과는 별도로 ‘오너 리스크’에서 발생할 것인 만큼 향후 조 사장 등 3세들의 행보가 중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한진가가 경영권을 지켜내 조 사장이 그룹을 이끌게 된다면 조 사장은 곧바로 경영 능력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으로 보인다. 회사 안팎의 현안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은 본인과 관련된 논란을 잠재워야 한다. 조 사장은 인하대 부정 편입 논란과 일감 몰아주기 의혹을 안고 있다.
특히 대한항공이 2016년 조 사장 등 삼남매가 사실상 소유한 기내 면세품 위탁 판매 업체 ‘싸이버스카이’와 콜센터 운영 위탁업체 ‘유니컨버스’에 일감을 몰아줘 공정위 과징금 처분을 받은 것과 관련해서도 소송이 진행 중이다. 조 사장은 또 대항항공 직원에게 연차수당 244억 원을 지급하지 않고 생리휴가 3,000건을 부여하지 않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말한다. “사실 조원태 사장은 취임 후 이렇다 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경영권을 승계한 후에도 성과를 내지 못하면 내년 주주총회에서 KCGI 등의 공격을 받게 될 게 분명합니다. 따라서 현재 대한항공을 가능한 잘 경영하는 것이 조원태 사장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를 이어 일단 그룹 경영을 맡게 될 조원태 사장은 내년 한진칼의 사내이사 임기가 만료된다. 대한항공의 사내이사 임기는 이듬해 종료된다. 한진칼 경영권, 즉 그룹의 경영권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조원태 사장이 국내외 투자자들을 모두 만족시킬 만한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시점이란 평가다.

■대한항공 약사
대한항공의 전신은 1962년 설립된 교통부 산하 대한항공공사다. 1969년 조중훈 한진그룹 창립자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적자에 허덕이던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민간 항공사가 됐다. 대한민국 첫 민간 항공사 ‘대한항공’은 1969년 3월 1일 공식적으로 창립됐다. 대한항공은 창립 2년 후인 1971년 한국 최초의 태평양 횡단 노선인 서울~로스앤젤레스(LA) 화물 노선에 첫 비행기를 띄웠다. 이듬해인 1972년 서울과 LA를 오가는 여객 노선도 취항했다. 지금은 B777 42대와 A380 10대 등 항공기 161대를 보유한 대형 항공사지만 1972년만 해도 대한항공의 항공기는 미국 보잉사의 B747 점보기, 에어버스의 A300기종 6대가 전부였다. 1970년대 발생한 1•2차 오일쇼크로 글로벌 항공사들이 감원•감축의 위기를 겪었지만 대한항공은 이와 반대로 공격적인 확장을 통해 ‘정면 돌파’ 전략을 구사했다. 1973년 서울~파리 화물 노선, 1975년 서울~파리 여객 노선을 취항했다. 1980년대는 대한항공이 글로벌 항공사로서의 토대를 다진 시기다. 특히 대한항공은 자국 산업 보호를 내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정부의 막대한 자금 지원으로 대형 항공기를 확보해 공격적인 취항에 나섰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가 말하는 스튜어드십 코드와 연금 사회주의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는 국민연금과 같은 연기금이나 자산운용사 같은
기관투자가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충직한 집사(스튜어드•steward)처럼 지분을 가진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행동 지침이다. 지난해부터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국민연금은 올해 3월 주총부터 경영 참여를 본격화했다. 지난 3월 27일, 639조 원 기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을 저지했다. 조 회장은 1999년 4월 아버지 조중훈 회장에 이어 대한항공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지 20년 만에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지난해 1월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행사를 강조한 이후 주주가 대기업 사주의 경영권을 박탈한 첫 사례였다. 조 회장은 주주총회 참석 주주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야 사내이사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분 2.6%가 부족했다. 연임안 부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국민연금이었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 지분 11.56%를 보유한 2대 주주다.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주주총회 하루 전날인 3월26일 조양호 회장의 사내이사직 연임에 반대표를 던지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우호 지분 확보를 위해 총력전을 펼친 대한항공은 ‘2대 주주 국민연금’의 결정에 속수무책이었다.
국민연금 측은 대한항공 주주총회를 앞두고서는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지배주주 일가에 대한 재신임 제한에 나설 것이라고 했고, 주주총회에서 재신임 동의안을 부결시킨 후에는 스튜어드십 코드에 따른 결정이었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지분대결이라는 가장 시장 친화적인 방식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오너 일가에 제재를 가한 경우라 포장할지 모르겠으나, 국민연금은 공공기관이라는 점에서 공적인 권력으로 개인과 대립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이날 주주총회가 끝난 지50분 만에 입장문을 내고 “사법부가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는 대원칙에도 반하는 결과일 뿐만 아니라 국민연금이 민간기업의 경영권을 좌지우지하게 된다는 ‘연금사회주의’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있는 만큼 보다 신중했어야 하는데 아쉽다”고 밝혔다. 정부와 여당 판단은 달랐다. 건강한 자본주의 시장을 위해서라도 스튜어드십 코드는 반드시 안착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국회 정무위원회에 출석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의 긍정적인 면을 잘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조양호 회장의 별세 이후 스튜어드십 코드가 주주 권익보호라는 긍정적 기대효과와 지나친 경영권 간섭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다시 맞물리면서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윤창현 서울시립대학교 경영학부 교수에게 의견을 들어봤다.

Q.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후 지난 3월27일 열린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에 반대표를 던지며 연임을 저지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A. 보건복지부 장관이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장인 국민연금은 전문성과 독립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국민연금이 성급하게 정권의 집사로 나선 상황으로 보여서 문제가 많다는 의견이다. 전문위원회가 있기는 하나 기금운용위 자체가 독립성을 결여한 상황이라 문제가 많은 상황이다. 정부가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

Q. 우리나라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행사가 원래 취지와 다르게 대한항공 사례에 적용된 부분이 있는지 궁금하다.
A. 스튜어드십 코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원인 중 하나가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들의 단기투자 때문이라는 반성 속에 2010년 영국에서 처음 도입했다. 이후 20여 개국이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대기업 압박 수단으로 변질하는 모습이다. 해외에선 스튜어드십 코드를 자율규범으로 여기고 있어 정부가 나서 코드 발동을 강제하는 경우는 드물다. 정부가 나서서 추진하는 경우 독립성과 전문성이 의심되는 면이 생기게 된다. 스튜어드는 ‘집사’라는 뜻이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돈인데도 국민의 집사가 아니라 이를 관리하는 정권의 집사같이 행동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국민들은 국민연금이 수익률을 중심으로 한 장기적 관점의 투자를 통해 수익성을 높이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소위 재벌개혁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국민 정서와 상충될 여지가 크다고 생각한다.

Q.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행사에 대해 ‘연금 사회주의’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A. 연금 사회주의는 연금이 연금가입자 내지 근로자의 돈을 모아 기업의 지분을 매입한 뒤 근로자만을 위한 의사결정을 내리면서 문제가 생긴다. 기업가치 제고와 장기적 관점의 투자가 소홀해지는 등의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 국민의 연금을 관리•운용하는 국민연금이 연금가입자들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의 정치적 목표를 수행하는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 때문에 연금 사회주의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Q.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의 전문성과 독립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A. 정부로부터의 독립성은 거의 없다고 보인다. 전문성은 일부 축적된 바 있으나 의결권행사와 관련해서는 더욱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특히 의사결정의 독립성이 확보되지 못한 경우 전문성 자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독립성에 대한 고려가 중요하다.

Q.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조양호 회장 별세로 한진그룹 총수를 5월 1일 새로 지정해야 하는 데 대해 “조금 늦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의견이 궁금하다.
A. 공정거래위원장은 기업 경영과 관련해 좀 더 신중한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기업경영에 대한 간섭과 개입은 최대한 차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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